전란 속에서도 찬란했던 이화


“지금 인민군들이 탱크를 몰고 의정부 쪽으로 해서 서울 시내 쪽으로 대거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무조건 이 기숙사 문을 닫아야 하니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친척집이든 친구집이든 어디든지 빨리 가십시오. 빨리 해산! 해산!”

-「6․25가 짓밟은 나의 대학 생활」

 1950년 6월, 6․25전쟁이 시작되고 본교 역시 시련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기숙사생들의 피난이 시작됐고 전란 중 건물은 군대의 본부로 사용됐다. 본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화 100년사」, 「6․25가 짓밟은 나의 대학 생활」, 「서울/6․25/부산/다시 서울」등의 도서를 통해 본교가 전쟁을 겪어낸 과정을 살펴본다.

△6․25전쟁 속 이화, 수난을 겪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전국에 전쟁을 알리는 라디오와 가두방송이 본교에도 울려 퍼졌다. 정부에서 정확한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음에도, 전세의 심각성을 깨달은 본교는 6월27일 독자적으로 휴교조치를 취하고 전 기숙사생을 귀향시켰다. 그러나 28일 오전 2시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교수와 학생들은 9․28수복까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본교 내에서는 이념상의 분열이 발생했다. 7월 초순에 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였던 공산주의자 허동과 본교전문 가사과를 졸업하고 공산진영에서 활동을 하다 월북했던 이운제가 북한에서 정식 파견돼 본교를 접수했다. 당시 정동유치원에 마련된 접수본부에는 의학과의 최린 등 5~6명의 공산진영의 교수들이 출입했다. 6․25에서 9․28수복까지 허동과 이운제가 본교에 머물렀던 3개월의 기간 동안 교수들은 공산진영의 강요로 <자술서>라는 자아 비판서를 써야만 했다. <자술서>의 내용은 반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성찰로 추정하고 있다.

공산 활동을 해왔던 몇몇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인민재판식 비판을 통해 교수들에게 파면선고를 내렸고, 그 결과 7월24일경에는 120명의 교수 중 7~8명만 남기고 모두 축출됐다. 7월31일에는 공산진영에서 총궐기대회가 있다며 교수들을 모이게 해 강제납북을 시도했다. 이때 대부분의 교수들은 피신했으나, 잘 모르고 나왔던 교수들은 납북됐다.

인민군이 학교를 사용한 이 기간 동안 폭격으로 인한 건물의 피해도 막심했다. 전쟁 직전에 신축 중이던 과학관, 총장공관과 영학관, 동대문부속병원 본관 등이 피해를 입었으며, 가사 실습소는 전소되고 본관도 절반이 불에 타 30%정도만 이용할 수 있었다. 복구비로 12억5천450만원이나 드는 막대한 피해였다.

또한 인민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유엔군과 중공군이 번갈아가며 학교에 주둔해 많은 손상을 입었다. 중공기병대가 주둔하며 식당을 마구간으로 쓰는 등 다른 나라의 부대가 계속해서 주둔함으로써 건물내부는 더렵혀지고 시설이 파괴됐다.

△부산 피난학교, 이화 교육의 불꽃을 살리다

본교는 9․28수복 직후 피해건물의 재건, 인사문제의 정비 계획을 전개하고, 학적부를 정리하며 학생등록을 받았으나 또다시 1․4후퇴로 피난길을 걷게 됐다. 6․25발발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고초를 겪었던 교수들은 이때 모두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이를 위해 본교에서는 교수 1인당 30만원의 피난자금과 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3월16일 서울을 탈환했고, 이후 38선 부근에서 각축을 벌이다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차츰 생활의 안정을 되찾으며 부산으로 옮겨진 정부도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할 ‘전시연합대학’이라는 교육시책을 마련했다.

1951년 2월 본교 교수들과 학생들은 ‘전시연합대학’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본교생의 교육을 개별적으로 진행하고자 단독 개교를 계획했다. 본교는 1951년 1월 피난지에서 임시로 발행되던 신문에 “학교를 시작할 터이니 이화의 교수들은 모이라”는 광고를 게재해 교수들을 모았다. 1951년 8월 본교는 국유지 혹은 귀속재산인 농지와 임야를 확보해 정부와 임대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사무실, 교수실, 일반교실, 도서관, 강당, 학생식당 등 총346.2평에 이르는 총30동의 막사를 지어 1951년 9월1일 개학식을 거행했다.

본교는 1951년 9월18일 ‘이화여대 재학생에게 고함’이라는 신문광고를 통해 9월25일부터 29일까지 학생들이 피난학교에 등록하도록 공고했다. 이때 859명이 등록했으며 이후 각 지역으로 흩어졌던 본교의 학생들이 개교소식을 전해 듣고 복학했다. 신입생도 모집해 1952년 5월에는 1천500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게 됐다.

교실부족, 교수부족, 경비부족 등으로 피난학교의 운영이 순탄치는 않았다. 겨울엔 난로가 없어 추웠고, 여름엔 햇볕의 열기로 뜨거웠다. 비가 올 때면 비가 새 우산을 받쳐 들어야 했고, 폭설이 내리던 날엔 도서관의 천장이 무너졌다. 시인 권남지(국문․53년 졸)씨는 수필 「6․25가 짓밟은 나의 대학 생활」에서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교실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었는데 가마니를 쭉 깔고 책상도 없이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공부했다. 판잣집이라 여름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손이 시려 연필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중략) 그 때만 해도 쌀에 돌이 많아서 큰 양철자배기에 쌀을 씻어서 이는데, 밥 짓는 데 전혀 경험이 없는 우리 학생들이라 돌밥도 많이 먹어야했다.

교육활동 외에도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진행했다. 미국에서 보내온 돈과 국내의 찬조금으로 완성한 판자 대강당에서 연극공연, 문학의 밤, 음악회 등을 열었다. 또한 이정애 선생이 피난길에 간직해 온 미술․공예품을 팔승각 양관에 마련한 박물관에 전시했다. 시인 김양식(영문․54년 졸)씨는 수필 「서울/6․25/부산/다시 서울」에서 전쟁 중 학교 풍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런 맨바닥 교실에서 교수진의 부족으로 총장이시던 김활란 박사님도 영시 강의를 하셨고, 그 때만해도 정열이 불꽃같던 모윤숙 선생님의 시문학 강의도 잊을 수 없다. 음악과에서는 역시 임원식 선생이 계셨고, 소프라노 김복희 선배의 화려한 오페라 ‘카르멘’ 공연은 그 피난지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화, 새롭게 교육의 전당을 세우다

 소련과 미국 간의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1953년 8월31일 본교는 부산에서의 피난학교를 정리하고 서울 신촌으로 돌아왔다. 신촌의 건물은 전쟁으로 인해 상당히 손상돼 있었다. 본관 지붕은 폭격을 맞아 무너졌고 건축 중이던 총장공관과 과학관은 완전히 파괴됐다.

 본교는 9월1일부터 신촌캠퍼스에서의 업무를 시작했으며 미국여선교회, 교회여성연합회 등 국내외의 후원으로 마련된 재건비용을 토대로 재건계획이 진행했다. 「이화100년사」에는 당시 영문과 학생이었던 김승숙 씨의 회고가 나온다.

“교정에 요란한 차소리가 나면 대개는 새 의자나 목재 또는 모래 등을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오는 것이었고 짐을 부리는 인부들의 콧노래가 지리한 공부시간에 재미있게 들리는 적도 있었다.”

 1953년 9월21일에는 피난학교에서의 교구를 옮겨와 피해가 적은 강의실에서 2학기를 개강했다. 이때 등록생 수는 약2천160명이었다.

 본교가 신촌캠퍼스로 이전한 후 학생과 교수의 수는 해마다 꾸준히 증가했다. 전쟁 직후 학생 수는 2천328명에 불과했지만 1954년에는 3천136명, 1955년에는 4천38명으로 그 수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속된 교수충원의 결과 1955년 4월에는 전임교수 180명, 강사 100명이 교수진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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