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영어를 배우면서 대명사가 왜 그리 많은지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말에는 주어일 때는 ‘그가’, 목적어일 때는 ‘그를’, 복수일 때는 ‘그들’과 같이 격조사 ‘-가/을’이나 복수의 접사 ‘-들’을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영어는 모두 모양이 다르다. 거기다 성별표지가 반영되어 3인칭은 he와 she로 나뉘어 격변화를 하기 때문에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났었던 것 같다.  

한국어는 성의 구별이 언어에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sex)을 선택의 기준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법적인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 구별은 없을지라도 사회의 관념이 개입된 성 구별은 존재한다. 이를 테면 의사나 변화사란 직업을 들었을 때 남성을 떠올리는 반면, 비서나 간호사란 직업을 들었을 때 여성을 떠올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의사나 변호사, 비서와 간호사로 일하는 사람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인데, 이들은 아저씨, 아줌마, 소년, 소녀와 같은 명사들이 남성/여성의 성별 자질에 의해 구별되는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의 자질 부여이다. 사회에 위계질서가 생겨나고 성별에 의한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해당 명칭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이 생겨났고 따라서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일반인들은 특정 직업에 성별을 붙여 어떤 것은 남자를, 어떤 것은 여자를 선택한 것으로 해석가능하다. 

사회에서 부여한 성별자질을 담은 단어를 찾는 데 가장 편리한 것은 사전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한자어 남, 녀는 다른 단어와 합성하여 새로운 단어를 형성한다. 한자는 글자 하나가 독립된 뜻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결합하기만 하면 수많은 단어를 생성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생산력이 높다. 사전에도 ‘X+남’, ‘X+녀’의 형태로 실린 단어가 많이 있는데, 어떤 경우는 남성항(‘X+남’)만 있고 어떤 경우는 여성항(‘X+녀’)만 있으며, 일반항과 남성항, 여성항이 모두 있는 것도 있다. 사전에 가장 많이 실린 유형은 왕, 여왕처럼 남성항은 없고 일반항과 여성항만 있는 것이며, 선생, 남선생, 여선생과 같이 일반항과 남성항, 여성항이 모두 있는 것이 두 번째로 많았다. 세 번째로는 여권신장, 여알(女謁:궁중에서 여자가 소란을 피우는 일), 남근기, 남계혈족처럼 각기 여성항과 남성항만 있는 것이고, 마지막은 창, 남창처럼 여성항이 없고 일반항과 남성항만 있는 것이다.

인간을 성별로 분류하면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듯이 선생을 성별로 분류하여 남선생, 여선생으로 지칭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왕과 여왕, 사장과 여사장처럼 일반항과 대별되는 여성항만이 존재하는 것은 일반항은 남성을 지칭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남성이 무표적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더구나 왕, 장군, 사장, 호주 등 사회에서 힘과 권력을 잡아 위세를 떨치던 영역에서 남성이 무표적이라는 사실은 여성의 존재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사회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어 여성인 필자로서는 썩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다면 일반항과 남성항만 존재하는 것은 일반항이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여성이 무표적이고 세상의 기준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여성해방이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세상도 세상 나름이다. 남성과 여성이 무표로 인식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여성이 무표인 단어는 창과 남창, 사당과 남사당이다. 우월한 지위도, 사회의 권력을 손에 쥔 모습도 아니다. 속가를 부르며 웃음을 팔아 목숨을 연명했던 사당이나 노래와 웃음을 팔며 살아갔던 창, 그리고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인 일색, 이들은 성과 외모를 무기로 했던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어, 오히려 이들에 남성항이 없는 것은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 여성차별적인 지배구조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성항과 여성항만 존재하는 예시 역시 남성 위주로 사회가 운영되었으며 여성은 그 아래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현실을 담고 있다. 남성항만 있는 것은 남근숭배, 남계혈족, 여성항만 있는 것은 여알, 여류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전자는 사회에서 숭배의 대상,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인 데 비해, 후자는 사회를 어지럽히거나 주류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여 열등한 존재, 부차적인 존재였음을 보인다. 따라서 사회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여성들의 자각이 반영된 여권신장, 여성해방 등 여성항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남권신장, 남성해방이란 단어가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남성위주의 위계질서 아래에서의 여성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사전은 일정 시기에 쓰인 말을 조사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을 골라 싣는다. 따라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말은 사전에 실리지가 않는데, 언중에게 용인된 말은 당시의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편찬된 사전을 검토해 본 결과,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여성항이 대폭 늘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일반항, 남성항, 여성항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사회적 위치에서 열등한 존재였던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듯 여성항은 아예 존재하지 않은 단어가 많았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에서 일정 지위, 직업을 갖는 것이 현실에서 유표적인 현상으로 여겨진 뒤로는 이 여성을 가리키는 여성항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1957년 <큰사전>에는 여배우, 여학생, 여교원 등이 실리고 1991년 <우리말큰사전>에는 여선생, 여기자, 여교장 등이 실렸다. 최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여교수, 여승무원, 여사무원 등 다양한 직업관련 어휘들이 실리기 시작했고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이 목록은 점점 더 확대될 예정이다.

물론 여성의 존재가 독특함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일반적인 현상으로 느껴지면 결국 일반항, 남성항, 여성항이 모두 존재하는 유형으로 바뀔 것이다. 1957년에 실린 선생이 현재 남선생, 여선생처럼 균형잡힌 모습을 갖춘 것은 교육현장의 여선생이 언중에게 자연스런 모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의사, 남판사 등은 실리지 않아 특정 영역에서의 여성 역할에 대한 편견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전통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성별이데올로기를 없애고 남녀가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행동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주위에 여의사, 여판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그날, 남성은 남판사, 남의사로 불릴 것이며, 언중의 사회인식 체계 역시 바뀌어 새롭게 편찬될 사전에는 남성항이 대폭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 모든 단어들이 남녀 공히 있는 균형 잡힌 모습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 단계씩 걸음을 옮기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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