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126주년 대동제를 맞아 본지 기사를 통해 ‘메이퀸’, ‘이화 축전’, ‘대동제’ 등으로 구성된 본교 축제의 역사를 살펴봤다. 축제는 1908년 시작된 메이퀸, 1985년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첫 대동제, 학생들의 관심사가 반영된 2000년대 대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어왔다.

△1900~1970년대, 메이퀸의 시대

 1908년 스크랜튼 선생을 최초 ‘메이퀸’으로 추대한 것을 시작으로 본교는 70년대까지 메이퀸을 선발했다. 메이퀸은 일제의 간섭으로 한동안 추대하지 못하다가 1947년 메이데이 때 부활해 교수와 학생 대표가 성적이 3.0 이상인 4학년 중 진선미 정신을 대표하는 학생을 뽑았다. 이후에 6.25 전쟁 발발로 중단됐다가 1956년 개교 70주년을 맞아 다시 시작됐다. 메이퀸은 먼저 과퀸을 선발해 인품, 자세, 체격, 용모, 의사표현 능력 등을 평가한 후 본선을 거쳐 메이데이에 여왕대관식을 치렀다.

 본지는 메이퀸 성대한 여왕대관식과 함께 메이퀸으로 선발된 학생의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1964년6월1일에 보도된 제206호 1면 기사에는 ‘(전략)…흰 옷차림의 여왕 고선희(의본 2)양이 해군의장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27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입장, 수많은 카메라맨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상수리 나뭇잎으로 장식된 하얀 길을 걸어 여왕식으로 행진했다…(후략)’라고 여왕대관식의 모습을 묘사했다.

 본교의 메이퀸 행사는 외부인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각종 언론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유명했으나 70년대 이후 의미 변질을 이유로 폐지가 주장됐다.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진 학생을 뽑자는 본래 의미가 외모지상주의, 화려한 행사, 과한 준비 비용, 학생들간 소외 등의 문제로 퇴색됐다는 여론이 강했다. 본지는 제589호 ‘메이퀸 그 존재의 의의는 이미 사라졌는가’(1977년5월27일 보도)에서 학생들의 찬반 의견을 실었다.

 1978년 5월에는 메이퀸의 존폐를 두고 과마다 투표하기도 했다. ‘24개 과퀸 선발 않기로’(1978년5월5일 보도)에서는 ‘46개의 과 중 과퀸을 선출한 과는 22개 과로 메이퀸 선출을 반대한 과는 24개 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으며 이후 본교는 회의를 통해 여론에 따라 메이퀸 행사를 열지 않겠다고 밝혔다. 메이퀸은 이듬해인 1979년 4월, 학도호국단(1940~1980년대 존재한 학생자치훈련단체)에서 실시한 ‘5월의 여왕 선발과 (반)별 조사서’에서 학생 51%가 메이퀸 반대, 25.4%가 찬성을 들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한편, 메이퀸과 맞물려 ‘이화잔치’, ‘이화축전’ 등의 이름으로 축제가 진행됐던 축제도 있었다. ‘아늑할 메이데이’(1964년5월25일 보도)에는 이화잔치 일정을 담아 ‘1천 쌍의 초청받은 남녀가 입장해 장기자랑과 학생관, 공관 뜰, 체육관, 중강당, 레크레이션 홀 등 다섯 곳에서 게임이 벌어진다’고 알렸다.

 이화축전에서도 100m 달리기, 3천m 계주, 총장배 배구대회 등의 체육대회와 판소리, 굿 등이 열렸다. 가장 인기 있던 순서는 남녀가 짝을 지어 춤을 추는 ‘쌍쌍파티’로, 본지는 제512호에 쌍쌍파티에만 관심 두는 학생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사회문제와 함께한 대동제

 1983년 12월21일, 문교부가 발표한 ‘학교자율화 조치’로 인해 학생들이 모이기만 하면 반정부 시위를 한다는 이유로 학교 측은 축제를 무기한 연기했다. 2년 후 1985년 3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면서 공동체 의식을 중심으로 한다는 의미로 ‘대동제(大同祭)’라는 이름의 축제가 시작됐다.

 1980년대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여성 운동 등의 운동 정신을 기본으로 축제를 진행했다. ‘29일, 개막전을 필두로 3일간 진행’(1985년5월27일 보도)에 따르면 개막식에는 ‘여성문제를 일제시대부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적 고찰’을 주제로 가장행렬을 했으며, 축제 기간 동안 여성문제에 대해 논하는 강의를 열기도 했다.

 4~5천 명의 학생이 영산줄다리기, 강강술래 등의 행사에 참여해 단합하기도 했다. 1983년도부터 시작된 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 영산줄다리기는 2000년대 이후 대학에서는 본교만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2010년5월24일 보도) 학생들은 대동제에서 민요를 배우거나 탈춤을 추며 흥을 돋웠고, 동시에 마당극, 마당놀이, 지신밟기 등 전통적인 놀이와 의식이 이어졌다.

 한편, 1990년대 대동제에서는 통일이 화두가 되기도 했다. 1993년 5월24일 자 본지가 보도한 대동제에는 ▲이화사랑 대학발전 거리 ▲한총련 거리 ▲민속놀이 거리 ▲자주 여성의 거리 ▲통일의 거리의 5개 거리가 조성됐으며 ‘통일의 거리’에서는 북한 음식 장터 등 북한 관련 문화 행사가 열렸다.

 대동제에서 운동을 하는 양상에서 장터가 중심이 돼 소비문화를 경계하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본지 여론광장(1990년5월28일 게재)에는 ‘흥청망청 대동제 풍토 시정-올바른 인식 통해 하나의 공간 이뤄야’는 제목으로 글이 게재됐다.

 이외에도 1990년대 고대생이 대동제에 난입해 본교생이 부상을 당한 사건, 1980~90년대 동안 완화된 외부인 출입 규정, 대동제 행사 동안 휴강하는 등의 크고 작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다. ‘기간 중에는 단축 수업’(1982년5월17일 보도), ‘28일 개막식, 축제 기간 중 수업 없어’(1983년5월16일 보도) 등의 중간제목으로 축제 기간에는 단축 수업을 하거나 수업이 아예 없는 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중문화 유입으로 다양한 축제 모습 나타난 2000년대

 2000년대 대동제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의 관심사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2000년 5월22일자 ‘함께 가자! 새 천 년 대동의 장’ 기사에는 음대가 주최하는 야외 공연, 열기구 동아리 아이리스의 열기구 시범 운영, 체대의 ‘이화인 하나되기 축구 대회’ 등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990년대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대동제 속에 기업의 후원, 연예인 콘서트 등이 유입돼 축제 문화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도 2000년대 대동제의 특징이다. 본지는 1994년 5월30일 자 ‘94년 대동제를 돌아보다-대중문화의 학내 유입 두드러져’ 기사를 통해 TV 프로녹화, 무대설치, 촬영기기 등이 학생들을 소품화했다고 지적했다. 본지에 실린 ‘대동제 타령’(2003년5월19일 게재)은 “바람이 분다/바람이 분다/아 대동제에는 암표 바람, 연예인 바람/…(중략)…/최근 대학 대동제는 대학인의 축제가 아니라 인기인의 축제가 돼버렸네…(후략)”라며 대동제의 상업화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

 예전과 달리 대동제에 참여하는 학생이 줄어든 점도 눈에 띈다. ‘모두 하나 되기엔 부족한 대동제’(2007년5월27일 보도)에서는 홍보부족 문제, 공간문제 등을 꼽으며 대동제에 학생의 참여가 부족했던 점을 지적한다. 과거에는 4~5천 명이 참여했던 영산 줄다리기 또한 매년 길이가 줄어들어 참여자가 3~400명에 그친다.

 올해 대동제는 기업의 후원을 거부하고 본교생이 꾸린 장터, 공연 등으로 이뤄진 대동제를 진행했다. 학생들은 장터에서 직접 만든 음식, 수공예품을 파는 등의 활동을 하고 ‘배꽃 엔딩’, ‘나는 가수닷’ 등 총학이 진행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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