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창립 126주년을 맞아 문헌을 통해 본교의 ‘이화’라는 교명의 어원을 살펴본다. 이화의 어원에는 고종황제 하사설과 명성황후 하사설 두 가지가 있다.

△김윤식이 올린 학당명 중 고종이 ‘이화’ 선택

 이화 학당의 존재가 고종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메리 스크랜튼(M.F. Scranton) 여사가 모임을 개최했을 때다. 1887년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던 스크랜튼 여사는 당시 외서독판(현 외교부장관)과 외아문(현 외교통상부) 관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모임을 열었다. 스크랜튼 여사는 모임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학생을 모으지 못하는 학당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조선에는 외국인이 어린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먹는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고 있기도 했다. 외서독판 김윤식은 그 모임에서 스크랜튼 여사에게 학당이 왕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소문을 잠재우겠다고 약속했다.

 고종은 김윤식의 의견에 동의해 학당에 이화라는 이름을 하사하게 된다. 김윤식은 여러 개의 학당명을 지어 고종에게 올렸고, 고종은 이 중 ‘배꽃 핀 골에 세운 학당’이라는 뜻인 ‘이화’라는 이름을 택했다. 고종은 스크랜튼 여사에게 2*4피트 크기의 종이에 사방 25cm 크기의 한자로 ‘梨花學堂’이라 쓴 것을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틀에 끼워 선사했다. 왕이 사원에 현판을 내려줌으로써 해당 사원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 당시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그 뒤 이것을 현판으로 만들어 기와집 교사(校舍) 대문에 걸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오늘날 현판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스크랜튼 여사는 처음에 이화가 아닌 다른 교명을 원하기도 했다. 고종에게 올려진 학당명 중에는 완전한 믿음이라는 의미의 ‘전신(專信)’이라는 교명도 있었다. 스크랜튼 여사는 이화 학당이 선교기관이라는 점에서 이 이름을 희망했으나 고종의 은총에 따라 결국 ‘이화’를 학당명으로 사용했다.

 이 사실은 스크랜튼 여사의 보고문을 통해 드러난다.

외무대신이 나를 위하여 내가 정부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보여 줄 어떤 일을 하여 주겠다고 하더니 그 약속대로 며칠 뒤 학교 이름을 보내주었다. (중략) 곧이어 기수를 보내주었다. 기수를 채용한다는 것은 왕의 특별한 호의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로 한국인의 생각으로는 굉장한 일인 것이다. (중략) 학교 이름은 훌륭한 정도는 못된다 할지라도 왕이 내려준 것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당초 내게 전신학교(Entire Trust School)라고 줄 것 같더니 조선 관료들은 그것보다는 지금 대문에 달려있는 그것(이화)으로 바꾼 일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윤식이 고종에게 올린 이화라는 교명은 학당 주변 환경과 관련 있었다. 당시 학당이 자리하던 정동 일대에 배나무가 많았고 그 부근에 ‘이화당’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 이화라는 교명이 지역의 특색에 따라 기관의 이름을 짓던 풍토에 따른 것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교명을 하사받은 후 배꽃은 학교의 상징으로 이어져왔다. 과거 스크랜튼 여사는 배꽃이 여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모습이라고 설명했고 1887년 본교를 방문한 헨리 워렌(Henry White Warren)감독은 배꽃과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배 맛 같이 시원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라고 말하며 교명 ‘이화’와 배꽃을 연관 지었다.

 학교의 색 역시 교명에서 비롯됐다. 본교를 상징하는 색은 녹색과 흰색인데, 녹색은 배꽃의 이파리를 상징하며 흰색은 배꽃의 꽃잎을 의미한다. 1907년 4대 학교단장인 프라이선(Lulu E. Frey)씨가 배꽃이 학교상징이 된 후 암묵적으로 사용되어온 녹색과 흰색을 공식적인 학교 색으로 제정했다.

 고종황제 하사설은 외서독판 김윤식의 일기 「속음청사」와 당시 이화학당을 이끌던 스크랜튼 여사가 W.F.M.S.(Women Foreign Missionary Society)에 보낸 연례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실문장에서 따온 ‘이화’…명성황후 찬사의 표시

 워렌 감독이 미 감리교선교회에 제출했던 69회 보고서에 의하면 명성황후가 1887년 학당명을 하사했다고도 한다. 조선왕실의 문장인 이화를 황후 민씨가 하사했기 때문에 이화의 역사는 황후의 찬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W.F.M.S.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재 하에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왕비가 이화학당 즉 ‘배꽃학교’라는 뜻으로 이름을 하사하였다. 한국에 있어서 배꽃은 마치 일본(황실)의 국화문장이나 불란서의 백합, 랑카스타의 붉은 장미와 같은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화 스스로 명성황후 하사설을 정설로 삼고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 명성황후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선교사기관을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스크랜튼 여사와 명성황후 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 왕실의 문장이 이화(梨花)가 아닌 이화(李花)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성황후 하사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시대에 따라 변화한 이화의 교명

 교명 이화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했다.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920년대 중엽까지 사용됐다. 1910년 이화학당 내에 신설된 대학과는 미국의 정규대학의 수준으로 키우고자 했던 학교 당국과 선교사들에 의해 조선여자대학교(The Woman's College of Korea)라 불리기도 했다. 1925년 각각의 교육기관이 독립된 학제를 가지고 본격적인 학교의 형태를 띠면서 학당 분리가 불가피해지자 대학과와 예과가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돼 1928년에는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폐기되기도 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라는 교명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적으로 두 번 개명됐다. 1943년 12월에는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조치에 의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1945년 4월에는 배꽃이 과거부터 한국인에게 익숙한 꽃이었던 까닭에 ‘이화’라는 이름이 민족적인 색채를 띤다고 생각해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교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이화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고 10월22일 새롭게 개강했다. 이후 8월15일 ‘이화여자대학교’라는 교명은 정부의 인가를 받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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