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듯이 영어 ‘university’란 말의 어원인 라틴어 ‘universitas’는 현재와 같이 종합대학이 아니라 단순히 단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본디 서양 중세 후기에 세속인들을 위한 -사제들의 교육과 구분하여-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을 지칭하는 일반학원(studium generale)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의 동업조합이나 배우는 학생들이 조직한 향우회 등의 단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현재와 같이 학문연구와 고등교육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첨단기술 창조의 산실이자 예체능 교육과 기술의 전수를 망라하는 교육산업의 중추로서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 속에 실제로 근대 역사 및 지성사의 변화와 얽힌 근대 대학사의 복잡한 흐름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그 복잡한 흐름은 간단하게 말하여 지식추구의 전문화와 동시에 진행된 학문의 파편화 과정, 포괄적인 교양과 자율적 사고능력을 갖춘 인간의 양성이라는 고등교육 본래의 목표가 직업인의 양성이라는 세속적 목적으로 변질되는 과정, 그러한 과정들에 수반된 대학운영의 상업화와 관료화 과정 등이 어우러진 역사적 변천이다. 그러한 변천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는 건물의 신축이나 증⁃개축 또는 새로운 캠퍼스의 건설 등 세계적인 거대 기업들에 버금가는 거대 공간의 점유와 확충의 양상이다. 이화의 현재도 그러한 변화의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다.

  물론 모든 역사적 과정에는 나름대로의 필연성이 있으며, 대학의 상업화나 관료화나 거대 공간의 점유 현상은 고등교육이 사회적으로 존속하기 위한 현실 적응의 역사적 결과라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다만 그러한 추세를 절대적인 현실인양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러한 추세가 과도하게 되어 학문연구와 교육이라는 대학 고유의 존재이유가 세속적 이해타산에 훼손되는 본말전도의 부작용과 폐해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려 깊은 대학운영이 요구된다. 공간의 운용 또한 관료주의적 효율성이나 편의성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학문의 발전과 고등교육 이상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적과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적 판단이 필요하다. 대학의 그러한 공간운영의 원칙과 관련하여 현재 이화에 존재하는 심각한 문제 하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이화에는 ‘사회과학관’이 없다. 법학관, 인문관, 과학관 등 각 단과대학이 추구하는 학문 명칭에 상응하는 건물들은 있지만, ‘사회과학관’이라는 명칭의 건물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이화⁃포스코관’은 사회과학분야의 학과들이 주로 사용하면서 사회과학대학에 관리책임은 있지만 관할권은 없으며, 교무처와 몇몇 단과대학들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현재의 그러한 상황이 과연 위에서 제기한 공간운용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는지 여부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른 단과대학과는 달리 사회과학대학에는 그 학문의 명칭에 상응하는 건물이 없다는 사실은 일단 대학만이 아니라 모든 조직운영의 기본인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 평등한 하부 조직들은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형평의 원칙이 준수되지 않을 경우 조직 전체가 조화롭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끼는 구성원들에게서 조직에 대한 헌신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사회과학관’이 없다는 사실은 대학의 존재이유와도 배치된다.

  사회과학의 본령은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삶의 환경이자 삶의 목적 및 가치를 결정하고 제약하는 사회적 관념이나 질서 및 구조에 대한 지적인 탐색에 있다. 고대의 정치철학이나 중세의 신학 또는 근대의 사회과학 등 그러한 탐색에 대한 명칭이나 탐구방식 등의 차이를 떠나 그것은 인류지성사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자연과학 및 인문학과 함께 기초학문 삼위의 한 축이다. 그리고 자연과학 및 인문학적 탐구의 사회적 존재성 자체가 바로 사회과학적 탐구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을 떠나서는 학문의 완성은 물론이고 대학의 학문 활동 자체를 운위할 수 없다. 여기서 이화의 공간 운영과 관련된 현재 상황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일단 과학관과 인문관 그리고 여타 여러 응용 학문분야를 위한 건물은 있으면서 ‘사회과학관’이 없다는 사실은 이화가 사회과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이화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물론 대학의 건물에 반드시 학문분야의 명칭을 부여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당위는 없다. 실제로 대학의 건물들에는 그 설립 기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이 명칭으로 부여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사례 또한 절대적인 추종대상도 아니다. 중요한 점은 특정 건물에 기부자의 이름과 더불어 특정 학문 분야의 명칭을 함께 부여함이 대학의 현실적응과 존재목적이 진정으로 조화를 이루는 공간 운용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부자의 정신을 학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되고, 특정 분야의 학문 활동에 공간적 아이콘을 부여함으로써 그 학문 활동의 중요성을 제도적으로 추인하고 고취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아울러 그 공간을 출입하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도록 자극을 주는 소중한 교육적 기능도 있다.

  ‘이화⁃포스코관’은 본디 사회과학대학을 위해 설립된 건물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이화⁃포스코 사회과학관’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못할 학문적 이유도 현실적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대학 교수 및 학생 전체의 오랜 염원이기도 한 ‘이화⁃포스코관’ 명칭 변경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상황의 지속은 합리적 논변과 소통을 통해서 모든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사회의 본령과도 배치되며, 아울러 이화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불필요한 억측만 자아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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