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는 만난 지 4년 된 남자친구가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너무나도 아끼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이 남자친구의 학벌을 언제나 아쉬워하셨고, 급기야 얼마 전 집안 어른을 통해 소개팅 자리를 주선하셨다. 필자는 매우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오기가 생겨 대수롭지 않은 척 생애 처음으로 소개팅이란 걸 하게 되었다.

 현재 모 대학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27살의 그는 한마디로 참 착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그도 키가 좀 겸손하였으나, 유복한 집안에서 티 없이 자란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와 어울릴 것 같은 친한 친구들을 꼽아보며 그를 소개시켜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아뿔싸, 예기치 못한 복병이 숨어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우연히 듣게 된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친구와 그를 주선해야겠다는 필자의 생각을 고이 접어두게 만들었다. 우리 학교 선배이신 그의 어머니는 학창시절 촉망받는 인재로 큰 꿈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졸업 후 곧바로 결혼을 하면서 보통의 가정주부가 되셨다고 했다. 허나 문제는 자신의 모든 꿈들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선택들은 철저히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졌고, 의사가 되는 것도 사실은 어머니의 꿈이었다고 했다.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엄마와 떨어져 지냈던 6년이었어요."하며 마냥 착하게 웃는 그를 보면서, 필자는 마음속으로 '안녕히 계세요...' 작별을 고했다.

 자식을 자신보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부모님의 바람 속에서, 지난날 채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특히나 임신과 출산의 문제를 안고 있는 여성들은 아직도 일과 사랑 사이에서 한 가지를 포기해야하는 양자택일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더 많은 번뇌와 갈등, 후회와 미련을 안고 살아가는 듯하다. 아마도 성공적인 사회활동과, 동시에 사랑하는 이와의 미래를 꿈꿔본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이러한 문제로 고민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 속에서 고학력 여성들이 취집을 돌파구 삼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실제로 필자 주변의 많은 친구들도 졸업이 임박할수록 '솔직히 능력있고 날 사랑해주는 남자만 있으면 공부고 취업이고 다 때려 치고 결혼해서 아이나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 한 여성으로 태어나 건강한 아이를 낳아 잘 기르는 것이 어쩌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필자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만약 욕심 많은 본인이 꿈을 위해 최선도 다 해보지 않고 도피하는 심정으로 결혼하여 엄마가 된다면, 분명 아이에게 나의 미련어린 소망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감조차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나의 삶의 무게를 의탁할 백마 탄 왕자님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당장을 위해 회피해버렸던 그 모든 일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시 자신에게 후회, 체념, 집착, 불평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것을 필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마치 '업業'과도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의 업의 순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탐진의 마음으로 분별과 집착을 멈춰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의 끝없이 대물림되는 욕망의 사슬은 또한 오로지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문제를 충실히 감당해냄으로써 끊어낼 수 있다. 우리의 이루지 못한 욕망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집착으로 남아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전가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에 있어 의미 있는 욕망은 주체적으로 실현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그래도 성취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특히 이 사회를 살아가는 꿈꾸는 여성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필자로 하여금 그에게 작별을 고하게 만들었지만, 졸업을 앞두고 나약해져만 가는 필자에게 경각심을 갖게 해주셨다. 요즘 한창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 많은 이화인들도 아마 필자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저앉으면 결국 후회와 집착만 남을 뿐, 좀 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어보자. 결국 백마 탄 왕자님도 민폐녀 공주보다는 진취적인 그대의 것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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