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5월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있다. 필자는 스무 살 남짓이 되었다고 벌써부터 어버이날이니 스승의 날이니 하는 날에 카네이션을 사는 것을 주저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한 해가 지날수록 어버이날 부모님의 옷깃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달아 드리는 일이 쑥스럽기만 하다. 이대역에서 학교 정문으로 내려오는 길 가판대에 빨갛고도 탐스럽게 핀 카네이션이 필자의 마음을 질책하는 것만 같다. 청춘이라 불리는 지금 너의 모습, 그 모습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한 이가 누구인지 떠올려 보라고. 멋쩍은 생각이 들어 괜히 ‘엄마’라는 말을 입 속에서 가만히 굴려본다. 엄마, 엄마. 둥글둥글한 모음과 자음들이 입 안을 가득 메운다.

필자는 학생이고 기자이지만 집에서는 삼남매의 둘째로, 우리 집에서는 두 번째로 어린 ‘애’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가 학교에서의 하루를 바삐 보낸 후 광역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버스 좌석에 앉으면 비로소 하루 내내 필자를 조였던 긴장이 풀린다. 편안한 버스 좌석에 앉아 잠에 빠져들 무렵, 엄마의 안부전화가 온다. 집에 오는 길인지, 저녁은 먹었는지와 같은 일상적인 통화다.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면 휴대전화에 엄마가 보낸 문자가 와 있다. ‘힘들면 말 해. 버스정류장에 데리러 갈게.’

필자가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서서 무심히 하는 말은 ‘엄마, 배고파. 밥 줘.’다. 그나마 요즘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서 끼니를 챙겨먹는 일도 드물다. 필자는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을 때나 외식을 하러 나가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 엄마가 밥상머리에서 생선살을 발라 주거나 잘 익은 고기를 내 앞에 놓아 주는 일, 십 년 뒤쯤에는 필자가 필자의 딸에게 해 주고 있을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 필자가 ‘엄마’가 되면 아껴 마지않는 딸이 필자를 엄마라고 부름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의 말이다. 옹알이를 끝낸 아기가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기도 하다. 명사 ‘엄마’도 ‘어린아이의 말로, 어머니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엄마’라고 말할 때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날 선 하루를 마무리하며 둥근 말로 엄마를 부를 때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흐드러진 카네이션을 보면서 하루 일과의 긴장을 놓아버리는 순간에 ‘엄마’가 있음을, 또 시간이 흘러 그 자리에 필자가 있을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는 5월의 어느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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