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검은 리본 시위부터 1980년 서울의 봄까지, 이화에 불었던 민주화운동의 바람



<편집자주> 4․19 혁명부터 6월 항쟁까지 학생 운동은 한국 근대사에서 줄곧 중요한 지점에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해 1970, 80년대 이화 학생운동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1970년 계엄시대, 이화가 빛을 밝히다

1973년 유신 체제 하에서 열린 첫 대학생 시위였던 서울대 문리대 10․2 데모는 열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불꽃이 다른 학교로 금방 옮겨 붙지는 못했다. 그 첫 발을 이어받은 것이 본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10․12 검은 리본 시위였다. 채플 시간 데모 주모자의 가족인 이화인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성적 모욕을 폭로한 것이 발단이 됐다. 분노한 이화인들은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리본을 달고 결의문을 채택하며 후속 데모에 나섰다.

후속 데모는 ‘11․28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같은 해 11월28일 오후12시30분 채플이 끝난 후 김은혜(현 부천생협이사장)씨는 마이크를 잡고 ‘8천 이화 학우들에게’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대강당에서 나온 학생들과 강의실을 나와 합류한 학생들까지 약4천명의 이화인들이 대열을 짜고 교문 밖으로 몰려나갔다. 기동경찰대와 만난 학생들이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며 대치하기 시작한 30분 만에 김옥길 총장이 교문 밖까지 따라 나와 학교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고 약6시간을 연좌데모 하는 동안 김 총장과 약200명의 교직원이 옆을 지켰다. 오후6시30분 기동경찰대가 연막탄을 쐈고 졸도하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 김선욱 총학생회장은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대강당에서 철야기도회를 갖는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오전4시까지 16시간 동안 이어진 철야기도회에서 김옥길 총장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구속된 학생들과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했다. 김 총장은 이후 수배된 학생회 간부들을 총장 공관에 20일간 숨겨주기도 했다.

당시 학생 운동 중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4천명 규모의 가두시위와 철야기도회는 한 번 더 학생 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후 전국 대학생 시위가 궐기해 구속 학생에 대한 12․7 석방 조치가 이어졌다.

1975년 6월에는 ‘이대 동아투위 손수건 판매 사건’이 있었다.
당시 본지 기자로 활동하던 김경애씨와 의학과 학생이었던 김매자씨가 농성장에서 숙식하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군사 독재 반대 시위에 나갔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약100명의 언론인이 결성한 단체)를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손수건을 제작․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손수건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뛰어노는 동양화, 논어의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방무도위행언손(邦無道危行言遜,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동은 대담하게 말은 겸손하게 하라)’는 구절, 윤동주의 ‘서시’를 디자인한 세 종류였다. 신촌 캠퍼스에서는 김경애씨가, 동대문 의대 캠퍼스에서는 김매자씨가 판매를 담당했다. 이 손수건이 본교 졸업생을 비롯한 이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소문이 퍼졌다. 결과적으로 교수로부터 밀고당하게 됐지만, 가격이 개당 300원이었던 손수건 판매금 중 체포됐을 당시 10만원을 소지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긴급조치 9호에 의해 여대생 중 최초로 구속된 김경애씨는 “체포 당시 잡혀간다는 사실보다도 당장 수중에 있었던 지원금이 쓰이지 못해 아까웠다”고 회고한다.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 권한으로 발동되는 긴급조치 중 9호는 특히 집회와 시위,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동을 금지해 다수의 대학생들을 잡아들였다. 학내 긴급조치 9호 위반 첫 사례가 대형 조직이 아닌 개인이었다는 사실은 이화 학생운동이 그만큼 일부에 치우치지 않은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80년대 서울의 봄, 이화에서 끝나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10․26 사건 이후 유신 체제의 끝이 다가온 것처럼 보였고, 대학생들이 가지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어떤 장애물이라도 넘을 수 있을 것처럼 컸다. 14일 오후부터 이화인들은 지역 대학생 약5만명과 연대해 종로, 청계천, 을지로, 시청 앞 등 도심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하며 시위를 벌였다. 대규모 가두시위의 열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고,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고무돼 있었다.

5․15 서울역 시위 때는 약10만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시가지를 점령했다. 그 중 7만명이 주집결지인 서울역에 모여 두 줄기로 나눠 행진하다가 경찰을 만나면 연좌해 농성을 벌였다. 시위가 도심을 장악하는 큰 규모로 진행되자 신현확 국무총리가 긴급 성명을 발표해 빠른 민주화 진행을 약속할 테니 학교로 돌아가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연세대, 본교 학생회장이 남대문 경찰서를 방문해 김종환 내무부 장관으로부터 안전한 귀가 약속을 받은 후 시위는 마무리됐다. 이날 해산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돌아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사기가 충천했다.

다음날 오후5시50분 전국 55개 대학교 학생대표 95명은 본교 경영대 강의실에서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아코디언룸(생활관 지하 대학건강센터 앞 휴게실)으로 자리를 옮겨 철야 토론을 계속했다. 토론은 ‘서울역 회군’ 결정이 타당했고 정부의 움직임이 있을 때까지 과격한 시위는 당분간 자제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었다.

서울의 봄이 끝나는 소리는 생활환경관(당시 가정관)에서 제일 먼저 들렸다. 토론이 한참 진행 중이던 17일 자정, 신군부가 국회를 봉쇄하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즉시 경찰이 토론장을 습격해 아수라장이 됐다. 55개 대학 학생대표 중 일부는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연행됐다. 이날 학생운동의 지도자격인 학생들이 대다수 체포되면서 이후 조직적인 학생 운동이 다소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본교 가두시위 등을 지휘했던 안숙 총학생회장 역시 2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졸업식 날에 제적당해 복교 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3년이 넘도록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학생들이 주체로 참여한 시위가 늘어났지만 이에 대해 정권은 비하하는 경향을 보였다. 1982년1월20일자 경향신문 ‘대학가의 음영’ 16번째 기사는 ‘네 여대생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본교 학생 조기숙씨의 시위 동기를 조롱조로 다루고 있다. 조씨는 ‘보이프렌드’인 L군으로부터 “인생의 반려자라면 반드시 이념이 같고 고난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여자여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하다가 소요사태를 일으켜 감옥에 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본교는 70년대부터 ‘새얼’, ‘파워’, ‘흥사단아카데미’ 등 상당한 수준의 운동 조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씨는 조직과 후배를 보호하기 위해 시위 동기를 남자친구의 영향이라고 진술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월간 ‘말’지는 본교에 대한 ‘시집을 잘 가려고 간판 따러 온 애들’이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오히려 본교 운동 세력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게 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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