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노동자를 불러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사람’이 왔다”라는 말은 30여년 전 독일의 외국인노동자 담당부서의 정부관리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고백과 함께 한 말이다. 1970년대 당시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끄는 최일선에 섰던 터키출신 노동자,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들은, 단지 노동하는 몸을 지닌 노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동안 체화된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실어 나르는, 문화가 결집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유럽국가가 그렇듯이 독일도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하고, ‘그들만의 권역’ 안에서 비가시적 존재로 살아가기를 무의식적으로 강요했던 셈이다. 즉 같은 사회 안에서 경계를 짓고 나와 관계없는, 철저한 타자로서의 자리매김을 당연시하는 묵시적 동의를 요구했었으나, 이주노동자들도 ‘사람’이었기에 독일사회에서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도 불사했던 것이다. 독일파견 간호사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자동 귀국해야할 처지에 놓이자 독일의 노동자들과 똑같은 종신계약을 요구하면서 파장이 커졌고, 독일의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측면 지원하여 결국 정년까지 계속 일하고 퇴직 후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은 독일 사회가 그만큼 성숙하고 합리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한국은 30여년 사이에 노동력을 외국으로 송출하던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와야 하는 나라로 국가의 위상은 변화하였지만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독일이 맨 처음 이주노동자들을 받을 때와 비슷하게, 그들도 인간적인 삶을 원하고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서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사회관계도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자주 망각한다.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등 주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유럽 등 서양에서 온 백인 외국인들에 대한 태도는 사회적 의식에 있어서 아직도 문화제국주의적 경향을 다분히 내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 여성에 대한 태도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떠날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섞이지 않으면서 ‘일만 하다 돌아가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방관적이지만, 결혼이주 여성들의 경우 가족을 이루어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한국사회의 확고한 구성원으로 지속적인 관계망 속에 들어오게 되는 까닭에 적극적인 ‘동화’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다.

   이자스민씨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마도 이러한 선택적 수용의 기제 또한 함께 작용하였을 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결혼이주 여성의 목소리, 즉 우리 사회의 하위주체로 하여금 목소리를 내게 한다는 취지에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김용 세계은행 사무총장의 기용이나 유럽의 K-pop 열풍 등을 보아도 전지구화의 영향은 문화혼종의 다양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의 다양성 수용이란 이미 선택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커다란 물결이 되고 있으므로 이제는 좀더 유연하게 문화혼종을 향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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