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학 정리한 후스와 김태준 “진화를 멈춘 문학은 부정돼야”

이제 후스의 『백화문학사』와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를 비교해볼 차례이다. 우선 후스와 김태준은 진화와 반진화의 관점에서 전통문학을 바라보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각 시대에는 각 시대 나름의 문학양식이 발전된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점, 과거문학의 전부를 일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진화의 길을 밟아 시대의 특색을 지닌 문학은 긍정되어야 한다는 점, 시대의 특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모방을 일삼아 진화를 멈춘 문학은 부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진화론적 관점이 전제됨으로써 후스와 김태준은 과거의 전통문학을 진화와 반진화(퇴화)의 측면에서 이원대립적 구조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후스는 전통문학사를 백화문학의 입장에서 서술함으로써 문언으로 된 고문문학을 부정하고 백화문학이 주류로 발전해왔음을 밝히고자 했다. 후스는 시문 중심의 고문문학이 자국문학이었으니 그 청산은 언문일치의 언어로 된 백화문학이 전통문학사 속에서 주류로 발전해왔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후스는 문언과 백화의 대립 속에서 백화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근대적 국민문학을 수립할 수 있는 근거를 역사 속에서 길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태준은 조선의 한문학은 중국 한문학의 모방에 지나지 않으므로 조선의 근대적 국민문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청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문학의 영향으로부터의 독립과 문언으로부터의 독립이 그것이다. 그래서 중국문학의 모방이요 문언으로 표기된 시문 중심의 조선한문학은 청산해야 할 두 가지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태준이 표현한 한문학의 ‘결산보고서’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후스와 김태준은 전통문학을 이원대립적 구조로 파악하여 시문 중심의 고문문학을 철저하게 청산하려 했고, 고문문학, 한문학에 대립되는 백화문학, 조선문학을 수립하기 위해 민간문학, 속문학의 가치를 크게 부각시켰다. 그들이 전통문학을 이원대립적 구조로 단순화하여 파악한 것은 근대적 국민문학의 수립이 그 만큼 절박했기 때문인데, 그 결과 시문 중심의 전통문학을 일괄 부정하는 단선적인 관점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다만 후스는 중국문학의 백화화(白話化) 추세를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문학사서술의 사명으로 삼았고, 김태준은 조선 한문학의 퇴화과정을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문학사서술의 사명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각기 구체적인 문학사서술의 내용은 다르다.

더욱이 후스와 김태준은 자국의 전통문학을 정리하는 데 유사한 관점을 드러내었지만 신문학의 형식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상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후스는 신문학의 형식적 모범을 서양문학에서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면, 김태준은 그것을 전통 국문문학에서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후스의 관점은 당시 서구화를 지향하던 중국의 신문화운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김태준의 관점은 중국문학의 모방인 한문학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문학’의 정체성 확립이 시급히 요청되던 당시 일제치하 조선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김태준이 문학사서술에서 ‘조선색(朝鮮色)’을 무엇보다 중시하여 작품비평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후스 이외에 김태준의 학문적 성취에 사상적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중국의 유명한 현대 시인이자 중국고대사 연구자인 궈모뤄(郭沫若)를 떠올릴 수 있다. 김태준은 베이징을 다녀옴으로써 중국문학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하였는데, 중국의 신문학에 눈을 뜨고 정치와 문학을 일원적으로 보게 되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다. 바로 이 정치와 문학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데 궈모뤄의 저술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김태준은 「외국문학 전공의 변」에서 당시 자신의 가장 큰 충동은 중국의 가장 우수한 중견작가인 궈모뤄씨가 쓴 『중국고대사회연구』를 읽은 데서 비롯하였다고 하였듯이 궈모뤄의 연구방법론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궈모뤄는 원래 중국 신문학에서 ‘창조사(創造社)’라는 문학단체를 조직, 낭만주의사조를 제창했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여신(女神)』은 중국 신시(新詩)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으며, 전통의 파괴와 자아표현을 부르짖으면서 1919년을 전후한 5.4신문화운동 시기의 시대정신을 폭발시켰다. 그 후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혁명문학을 제창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헌신하였고, 사회경제적 배경을 중시하는 이른바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중국고대사회를 분석한 『중국고대사회연구』라는 저작을 내놓았다. 바로 이 저작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중시하는 관점이 김태준에게 큰 충동을 주었으니, 『조선소설사』에도 간접적인 방법론적 영향이 반영되어 있거니와 그의 ‘시경(詩經) 연구’에도 참고로 활용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근대시기에, 특히 우리의 민족수난기에도 한중의 문학예술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았다.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의 교훈이 된다. 그것은 ‘차이’를 드러내고 또 인정하면서도 상호 ‘대화’를 열어가는 장(場)이었다는 점이다.

올해는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한중관계가 상호 긴밀해졌다. 전통문화, 학술문화교류, 경제협력, 남북통일 문제에 있어서 중국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세계적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고 있는 요즈음, 중국 지식인들은 경제적 성공에 힘입어 문화적 차원에서 ‘중국적 가치의 실현’이라든지 ‘세계 문명사적 기여’를 강조하고 있다. 언제나 깨어있는 자세로 중국 지식계의 최근 동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급속히 달라지고 있는 중국의 변화를 우리는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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