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제까지 비 스마트폰 유저였다. 이미 몇몇 지인들은 관계의 가벼움 때문인지 문자요금의 무게 때문인지 연락이 뜸해졌고, 팀플을 할 때면 구성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필자의 뒤통수에 꽂혔다.
 하지만 필자는 ‘그 폰’이 마냥 좋았다. 폴더를 열고 닫을 때마다 환상적으로 아롱거리는 불빛들이 왠지 모르게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폴더뚜껑에 붙여놓았던 도라에몽 스티커도,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필자의 이면을 상징해 주는 것 같았다. 서울만 벗어나면 통화권이탈로 송수신이 불가능했지만, 그 도도한 매력을 필자는 더욱 사랑했다. 무엇보다 조약돌 모양의 키패드를 꾹꾹 누를 때의 느낌이 참 마음에 들었다. 또 필자는 나름 저 멀리 사는 내 친구 북극곰을 위해 이 폰이 부서져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쓰겠다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됐는지 어젯밤 그 폰은 곱게 반 토막이 났고, 필자는 오늘부로 스마트 폰 유저가 되었다. 대리점에서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난 후 필자는 상실의 아픔이자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피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필자는 우리의 삶을 반짝이게 하는 아름답고 정직한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이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면, 손수 만든 공 테이프를 넣어 녹음을 하고, 음반 발매일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방과 후에 뛰어가 손에 쥐던 그때의 기쁨들. 이제는 손 하나만 까딱하면 수백 수천 곡의 음악들이 내 것이 되고 또 쉽게 버릴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네 삶 속에서 ‘나’를 위한 ‘나만의 것’들은 스멀스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만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스마트폰의, 스마트폰에 의한, 스마트 폰을 위한 것으로 변해가고, 느리고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것들은 사라지기를 강요받는다고 느낀다. 손끝만 스쳐도 휙휙 변하는 스마트 폰의 번지르르한 얼굴은, 가끔 필자에게는 혼란스러운 환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갈수록 관계도, 존재도 가벼워만 지고 내 앞의 단 한명의 ‘당신’에게도 좀처럼 집중해 줄 수 없는 이 시대의 속도 속에서, 친구들의 손이 되어버린 스마트 폰을 연상하는 것은 성급한 연상의 비약일까.
 아무리 ‘좋은게 좋은거야’라고 말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결정적인 ‘그 무언가’가 아닌가. 내 존재의 진가를 알아 줄 단 한 사람, 내 가슴을 쳐줄 단 하나의 글귀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그것은 언제나 정직함과 진지함, 그리고 필연 혹은 우연처럼 느껴지는 같은 삶의 신비로움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앱처럼 다운 받을 수 있는 것도, 무료문자처럼 쉽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형식과 도구의 발전적 변화로 인해  우리의 관계와 정서가 본연의 무게를 잃어간다면 그것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엄친아가, 엄친딸이 갈수록 넘쳐나는 시대에 왜 우린 ‘괜찮은 사람이 정말 없다’며 푸념할 수 밖에 없는가. 작고 왜소하며 변성기조차 벗어나지 못했던 첫사랑 그놈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편지지를 고르는 고뇌의 무게, 그에 대한 생각으로 지샌 수많은 밤들의 무게, 설레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필체들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생동하는 이 봄, 당신을 꾸~욱 눌러줄 그 누군가를, 그 무언가를 운명처럼 만나게 되길 소망해본다. 물론 당신이 스마트 폰에 빠져있다면, 그가 스쳐지나가 버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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