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들어 중⁃고등학생들에게는 ‘학생인권조례’란 이름으로 두발⁃복장의 자유, 체벌 금지, 휴대폰 소지 등이 허용된다고 한다. 그 조례는 소위 보수와 진보 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 항목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인들에게 그것은 인권이란 이념의 막중함에 압도되어 수긍의 대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그것이 교육에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권의 본원적 의미가 무엇이고, ‘학생인권조례’의 조항들이 과연 진정으로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는지, 정치적 편 가름 차원을 넘어 사태의 근본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human right’란 말 그대로는 ‘인간에 내재한’ ‘정의’ 또는 ‘올바름’을 의미한다. 그 말 자체에 처음부터 권리, 즉 ‘이익(利)의 저울질(權)’, 다시 말하여 개인의 이익이나 욕망 추구 자유의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디 서양의 중세시대를 지배하였던 ‘자연에 내재한 정의’의 이념, 즉 자연법 이념의 혁명적 변환이었다. 모든 인간들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보편적인 정의로 파악된 자연법이란 결국은 그것에 대한 해석을 독점한 교회 등 지배 권력의 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수의 정치철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의 본질을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재정립하려 시도한 결과가 근대적 자연권 및 인권 이념의 등장이다. 인간에게 초월적으로 부과되어 당연히 순응해야 할 자연법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에 잠재되어 있다는 인식의 대 전환이 일어난 것이며, 이에 따라 자연법 해석 및 실현의 주체로서 개인이 등장한 것이다.
  인권 이념의 출현은 정치사상사에서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전환에는 처음부터 인간 존엄성의 고양과 욕망 추구에 대한 무분별한 정당화라는 양면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한 양면성이 근⁃현대사를 통해 이룩된 위대한 정치⁃사회적 변화 및 발전과 더불어 대중정치 속에서 배태되는 온갖 희비극과 어리석음과 야만성을 현현한 드라마를 작동시킨 숨겨진 플로트였다. 인권이 정치권력의 부당한 행사나 사회 세력의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정당한 주장이나 이익을 보호하는 이념으로 작동할 경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에 사회나 국가 전체 차원의 정의 또는 장기적 국가 전략을 무시하면서 개개인들의 무분별한 욕망 추구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경우 인권은 사회나 국가를 인욕의 각축장으로 만든다. 근대정치사는 두 방향의 동인이 서로 길항관계로 작동한 무대로 해석될 수 있다. 
  인권은 ‘민심=천심’의 등식을 구현하는 숭고한 이념이 될 수 있다. 사회의 다수가 예의나 염치 등 전통적인 도덕관에 애착심이 있고, 깊은 사색과 관조 또는 심원하고 폭넓은 교양의 가치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있으며, 타인의 의사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사를 절제 있고 겸허하게 드러내고 표현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 다수가 절제되지 않은 욕구의 표출, 체계적인 사유와 판단과정이 뒷받침 되지 않은 의견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치졸한 감정표현과 상스러운 언행까지도 부끄러움 없이 천부인권 또는 자유의 실천인양 씩씩하게 외쳐대고, 정치인들은 그러한 대중적 정서에 부화뇌동하는데 급급하며, 사회적 지도층이 공인의식이나 도덕성과 교양을 주도하는 계층이 아니라 출세하고 돈 많은 인간들의 집단에 불과하게 될 경우, 사태는 달라진다. 인권의 행사는 인욕의 무분별한 표출로 변질되며,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무절제한 욕망에 좌우되는 포퓰리즘으로 변질된다.    인간의 욕망은 생명활동의 원천이다. 그러나 욕망의 추구가 언제나 정의롭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정의롭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정당한 욕망을 해치지 않거나, 특정한 욕망의 충족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 작동할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욕망의 정당한 실현에는 언제나 지적 판단이 작동해야 하며, 그러한 판단을 제대로 수행할 때 인간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성숙하고 행복하게 된다. 인간의 성장이란 바로 욕망을 대상 또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판단하여 절제 있게 추구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의 발달이기도 하다. 그러한 능력의 함양이 바로 교육의 요체이다.
  욕망의 추구가 절제를 잃고 허영과 과시욕이 편승할 때 가장 추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사자는 포악해 보이지만, 사냥 잘한다고 남에게 자랑하거나 포획물을 많이 쌓아 놓았다고 전시하려고 사냥하지는 않는다. 사냥감을 포식한 사자는 ‘맛있는’ 가젤이 옆을 지나가도 거들 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이자 본능으로 표현된 자연법이기도 하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욕망의 추구가 추악해지지 않고, 자연스런 욕망과 허욕 및 과욕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진정으로 아름답게 욕망을 즐길 줄 깨닫게 되는 동물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자극하고 고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적절한 체벌은 필요하다.
  강제성을 떠나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행동의 엄격함과 절제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사고 능력을 함양시킬 때 거칠고 뜨거운 젊은 영혼은 순화되고 성숙해지며, 그러한 교육과정을 거친 인간이라야 진정으로 자유롭고 존엄한 인권의 주체가 된다. 학생들이 머리를 염색하거나 휴대폰을 마음대로 사용하려는 욕구는 젊은이들의 순수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의 범속한 행태에 대한 모방적 욕망일 뿐이다. 그러한 욕망의 무분별한 허용은 자유인이 아니라 욕망의 노예들을 양산하며, 그렇지 않아도 황폐화되고 있는 공교육 현장을 더욱 황폐화시킬 뿐이다. ‘학생인권조례’의 논리라면 ‘음주권’ ‘흡연권’ ‘성행위권’도 인권의 이름으로 시급히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권이란 말이 한국의 정치판에서 위선과 허식의 빈말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서양 근대사에서도 위대한 정치철학자들이 사유의 고뇌를 통해 발전시킨 그 숭고한 이념이 삼류 지식인들에 의해 이권 투쟁의 구호로 변질되는 상황은 자주 발견된다. 이 땅에서는 더 나아가 그것이 우상화된 신성문자가 되어가고 있다. 종교적 우상화에는 대체로 신을 빙자한 세속적 이익 추구의 음험함이 있는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권의 우상화에는 대체 어떠한 음흉스런 이익이 도사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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