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을 만나본 한국인으로서 육사보다 한 달 앞서 1933년 5월 22일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 기자 신언준도 루쉰을 만났다. 신언준은 취재차 루쉰을 내방하고 루쉰과 대담을 가졌는데, 그 내용을 1934년 4월 『신동아』에 「루쉰 방문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그 동안 신언준이 루쉰과 만난 곳은 일본인 우치야마 간조(內山完造)가 운영하던 상하이의 우치야마서점(內山書店)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필자의 정확한 고증에 의하면, 그것은 우치야마서점으로부터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마련된 루쉰의 장서실(藏書室)이었다.이 장서실은 루쉰이 자신의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지만, 실은 요주의인물로 지목된 본인의 비밀장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우치야마서점 주인 내외의 안내를 받아 이 장서실을 찾은 신언준은 루쉰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눴는데, 신언준은 이때의 정황을 「루쉰 방문기」에서 “컴컴한 책성(冊城)을 등지고 그(루쉰)는 나와 정면으로 대좌(對坐)하였다”라고 서술했다. 신언준은 ‘대문호 루쉰’의 겉모습을 매우 평범한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그는 보기와 딴판인 건담(健談)의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하는 태도는 어린 아이들과 자근자근 속삭이는 천진미(天眞味)가 있다. 아주 무사기(無邪氣)하다.”라고 표현했다.

신언준은 신문기자로서 취재차 루쉰을 내방하였지만, 루쉰의 문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언준은 루쉰을 소개하여 “마치 메스를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물론 그 사람들은 모두가 환자) 마취약도 바르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해부하는 괴의생(怪醫生) 같이 보였다”라고 하였고, 또 “사실주의자 루쉰의 충실한 붓대는 냉정무사한 필치로 중국인의 진상을 그대로 폭로하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루쉰이 조선의 현실상황을 적극적으로 알아보고자 “조선 정형을 물었던” 사실도 빠뜨리지 않고 서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언준과 비슷한 시기, 즉 1933년 1월 루쉰을 내방한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교수 카라시마 타케시(辛島驍)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카라시마는 도쿄제국대학 중문과 출신으로서 중국 고전문학을 전공하였고 경성제국대학 중문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세 차례나 루쉰을 방문하고 루쉰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진보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신문예를 생생하게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의 사상탄압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중국 신문예를 생생하게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문단의 중심인물이던 루쉰으로부터 직접 문단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카라시마는 루쉰과의 교류 및 루쉰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매우 중시했고 중국의 신문예를 소개하면서 루쉰과 좌익문예를 대단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간여하여 조선 문인들을 일본의 전시체제에 동원하는 등 일본의 ‘국책’ 선전에 앞장섰던 장본인이다.

1937년 4월호 『조선 및 만주』라는 잡지에 실린 와카모토(岡本濱吉)의 「성대(城大) 교수 평판기(3)」에는 ‘카라시마 타케시 조교수’에 대한 평판이 서술되어 있다. “그는 중국문학사, 중국소설, 초사 등을 강의하고 있지만 좌익은 아니며 파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좌익에 동정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본심은 반동가라고 말하는 평판도 있다.” 이후 카라시마의 행로를 볼 때 와카모토의 평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 동안 중국 학자들은 카라시마를 연구할 때 주로 그의 루쉰과의 교류, 중국학연구 성과에만 치중하여 그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와 일본의 ‘국책’ 선전과 같은 사상적 경향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제 시야를 넓혀 확대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요컨대, 비슷한 시기에 루쉰과 인연을 맺은 이육사, 장혁주, 신언준, 카라시마는 나아간 길이 갈라졌다. 이육사와 신언준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진보적인 입장에서 중국 현대문학을 소개하거나 중국의 정치정세와 사상동향을 적극 소개하였다. 반면 장혁주와 카라시마는 점차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며 친일문학에 기울거나 일본의 ‘국책’ 선전에 적극 가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역사와 민족의 문제를 다시금 사고하도록 이끈다. 21세기에 이른 오늘날 역사와 민족의 문제가 절대화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역사와 민족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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