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충남 홍성에 있는 만해 한용운 생가를 찾은 적이 있다. 그 때 그곳의 시비를 통해 만해는 물론이요 시인 이육사, 윤동주가 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해방 직전에 서거하였다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는 민족 수난기에 가장 뛰어난 민족저항시인으로 일컬어지는데, 주지하듯이 이육사는 「청포도」, 「절정」, 「광야」라는 시로 유명하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절정」)라고 하여 겨울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오히려 강철로 단련되어 무지개를 꿈꾸었던 육사는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교목」)라고 하여 굳은 신념으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정신적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육사가 중국유학을 했으며 중국 현대문학을 국내에 적극 소개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육사는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고향」을 최초로 번역하였으며, 중국현대 시단을 소개하고, 서정시인 쉬즈모(徐志摩)의 시, 문학혁명을 제창한 후스(胡適)의 문학사저작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루쉰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중국 현대문학에서 루쉰의 무게를 고려할 때 그 인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고증에 의하면, 육사는 1926~27년 사이에 두 학기 동안 베이징의 중국대학(中國大學)에 유학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대학은 1949년에 폐지되었으며 육사가 다닌 곳은 정왕부(鄭王府) 캠퍼스로서 지금은 중국교육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육사의 중국대학 학적을 추적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는 중국대학 졸업생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육사가 한국의 유명한 민족시인이라는 걸 알고 중국대학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육사는 중국대학 이외에 1932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중국 난징(南京) 근교의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았고, 바로 이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잠입하기 직전 상하이에 잠시 체류하던 중 우연히 루쉰을 만나게 된 것이다. 1933년 6월 18일 당시 중국의 민주인사 양싱포(楊杏佛)가 암살되어 그 빈소가 상하이의 만국빈의관에 마련되었고, 육사도 조문을 위해 빈소를 찾았다가 쑨원(孫文)의 부인 송칭링(宋慶玲)과 함께 온 루쉰을 대면한 것이다. 육사는 1936년 10월 19일 루쉰이 서거한 후 나흘만에 『조선일보』에 「루쉰 추도문」을 게재하여 루쉰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이 글에서 그때의 정황을 소개했다. 육사는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루쉰)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라며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진보적인 문인 루쉰을 만나본 남다른 심경을 표현했다. 육사는 루쉰과의 만남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여겼던 것 같다. 육사는 그 후 문학창작에 매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현대문학을 적극 번역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육사의 「루쉰 추도문」은 추도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문학평론인 ‘루쉰론’이라 할만하다. 육사는 이 글에서 중국인의 국민성을 비판한 루쉰의 문학을 가장 정확하게 평가했다. 그는 우선 “루쉰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육사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서 루쉰이 취한 입장을 정확하게 정리해냄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문학창작의 방향으로 수렴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루쉰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루쉰의 위치는 높아갔고…….” 루쉰의 이러한 문학적 태도는 육사에게 문학의 예술적 독립성을 견지하면서도 예술과 정치를 통일시켜내는 관점을 확보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육사는 루쉰이 그랬던 것처럼 문학의 예술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민족과 역사의 문제를 체화하여 문학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저항과 진보를 대변하는 문인이 될 수 있었다.

루쉰 사후에 루쉰을 기리는 글을 쓴 한국 문인 중에는 장혁주(張赫宙)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일본 잡지 『문학안내(文學案內)』에 「독특한 작풍」이라는 제목으로 “루쉰의 작품은 다른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루쉰 특유의 작풍이었으며, 일면 오리지날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하고 싶습니다”라는 짧은 글을 실은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육사가 군사간부학교에 입교하기 전 그 해 3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재직하면서 신진작가를 인터뷰하였는데, 그가 바로 장혁주였다는 사실이다. 마침 장혁주는 일본잡지 『개조』의 현상공모에 「아귀도(餓鬼道)」라는 소설이 당선되어 크게 촉망받고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육사는 “그의 눈은 이지에 타는 듯이 빛났다”, “우리 장(張)군은 확실히 눈의 사람인 모양이다”(「신진작가 장혁주군의 방문기」)라고 하여 장혁주에게 상당한 호의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러나 바로 이 인터뷰 이후 육사는 곧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간부학교를 거치고 루쉰을 만나고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는 반면, 장혁주는 일본을 왕래체류하면서 일본 작가들과 교류하고 점차 친일적인 경향을 드러내게 된다. 이렇게 길이 갈라진 것은 개인적인 차이에서 비롯되었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당시 ‘중국’―국가나 민족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공간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이라는 활동공간과 ‘일본’이라는 활동공간의 차이도 육사와 장혁주 두 사람의 이후 행로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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