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전, 이화학당이 위치해 있었던 정동에는 대한 독립을 외치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화의 선배들도 너나할 것 없이 학생 독립운동의 선두에서, 후방에서 독립을 염원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평화로운 이화의 하늘 아래 살고 있다. 본지는 3.1절을 맞아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펼친 선배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꺼진 등불에 불을 켜라”…독립 의지 다진 이화의 선배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이화 교정에서는 매일 오후3시가 되면 모든 수업이 중단됐고, 학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1916년 무렵 학생들은 이문회, 유신회, 공주회 등 학생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특히 이화학당의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以文會)’에서는 당시 학생들에게 민족이 처한 현실과 세계 정세를 가르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사인 하란사(1896년 중등과 졸업)는 이화학당의 교사가 되어 1907년부터 이문회를 지도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꺼진 등불에 불을 켜라”고 말하곤 했다. 「한국근세여성사화 上」에서는 그를 ‘그녀는 불을 밝히는 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한국인의 긍지를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이 홀홀히 다루지 못하는 범하기 어려운 인품’을 지닌 인물로 적고 있다.

한편, 평양숭의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한 황에스터(황애시덕, 1910년 중등과 졸업)는 1913년 본격적인 여성 독립운동 조직의 효시인 ‘송죽비밀결사대(송죽회)’를 조직했다. 송죽회는 비밀리에 애국운동을 전개하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췄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 미국 등지까지 퍼져나갔으며  3·1운동 직후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된 애국부인회 활동의 기초가 됐다.

이화학당의 졸업생인 신마실라(신마숙, 1914년 대학과 1회 졸업), 박인숙(대학과 3회 졸업), 신준려(대학과 4회 졸업) 등은 모교의 교사로 남아 학생들과 함께했다. 하란사를 주축으로 한 이화학당의 교사들은 파리강화회담에 여성 대표를 파견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파리강화회담으로 파송되어야 할 의친왕이 일제로부터 강제 귀환을 당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하란사는 의친왕을 대신해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받아 북경 땅을 밟았다. 그는 북경의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서 잘못된 음식을 먹고 그해 4월 생을 마감했다. 여기에는 하란사의 파리행을 막기 위해 일제의 스파이가 그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남편 하상기가 부인의 사망 통지를 받고 북경에 다녀와 “그녀의 시체가 독약으로 인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고 전했다.

 

△“조용히 있으면 죽은 줄로 알 것이니 만세를 부르자”

1919년 2월28일, 이문회의 학생들은 이날 열린 정기 회합에서 3월1일 전교생이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약속한 날이 되자 학생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만세를 열창했다. 신덕심, 유점선, 김마리아, 노예달의 선도 아래 나선 무리의 학생들은 오후1시 탑골공원으로 들어갔다. 공원에 모인 각 학교의 학생들은 정재용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계속해서 종로 거리로 행진했다.

남은 학생들은 소복을 입고 대한문으로 행진해 곡을 하고 만세를 부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교외로 행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교문을 닫고 서양인 교사들에게 교정 곳곳을 지키게 했다. 당시 룰루 E. 프라이 학당장은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학생들을 만류했다. 이 가운데 서명학, 유관순,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의 ‘5인 결사대’는 다른 학생들과 기숙사 뒷담을 넘어 곧장 남대문 쪽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다. 이때 서대문서 경찰들이 교정에 출동해 주동자를 색출하려 하였으나 학생들이 협조하지 않아 교사인 박인덕, 신준려를 연행해 투옥시켰다. 이로 인해 3월10일 이화학당을 비롯한 10개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텅 빈 교정에 만세운동의 열기가 식을 즈음인 1919년 4월1일, 충남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은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헌병들이 달려와 총칼을 휘둘렀고, 유관순은 시위 주동자로서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그는 옥중에서 함께 수감된 어윤희에게 “밖에서는 조용하지마는 우리도 조용히 있으면 죽은 줄로 알 것이니 만세를 부르자”며 아침 저녁으로 만세를 불렀다.

졸업생들의 독립운동도 이어졌다. 이애라(중등과 3회 졸업), 최금봉(최매지, 중등과 7회 졸업), 박승일(중등과 8회 졸업), 채애효(중등과9회 졸업) 등이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여러 차례 투옥되거나 고문을 받았다. 「이화100년사」는 ‘이상에서 언급된 이화인들의 활동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그 외 졸업생들이 전국 각처의 학교에서, 교회에서, 특히 애국운동의 현장에서 크게 활약한 사실은 일일이 들어 기록할 수가 없을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화인의 독립운동은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신마실라는 3.1운동 때 해외로 망명해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백화점, 피서지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해 모은 돈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지원했다. 이화학당 교사였던 이화숙(1회 졸업)은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망명 지사들과 함께 활동하였고,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의 참사(參事)로 임명됐다. 그는 ‘상해애국부인회’를 결성해 교포 부인들의 독립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그 후 10년…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잠잠했던 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고, 다음해 1월 ‘제2차 서울학생독립시위운동’이라 불리는 ‘시내여학생만세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 이화여고) 4년생이었던 최복순은 근우회 간부인 허정숙의 지도를 받아 친구와 함께 태극기 100장과 구호가 담긴 격문을 만들었다. 격문의 내용은 ‘식민지 교육정책을 철폐하라’, ‘조선의 청년학생, 오호! 일본의 야만정책을 반대하라’ 등이었다. 최복순은 서울 시내 학교의 학생 대표들을 모아 1월15일에 독립만세시위에 궐기할 것을 결의했고,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이를 치밀히 준비했다. 이화여전 음악과의 이순옥도 ‘약소민족 해방만세’, ‘제국주의 타도만세’와 같은 격문을 만들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그해 3월 열린 재판에서 최복순과 이순옥에게 각각 징역 8개월, 징역7개월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참고문헌 : 「梨花百年史」, 「이화100년사」, 「한국근세여성사화 上」,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한국 근대 여성사 上」

임경민 기자 grey24@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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