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창간 58주년을 맞아 1954년2월12일 창간호부터 2011년12월5일 1416호까지 이대학보 1면 기사를 들여다본다. 본지가 학내 행사를 주로 다룬 50~60년대, 민주화 운동을 다룬 70~80년대, 등록금과 학교 앞 상업화를 다룬 90년대, 수업권 투쟁을 다룬 2000년대로 나눠 알아본다.


○ 교내 행사, 여성 고용과 교육 보도한 1950~60년대

학보가 발행되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당시 출판부 소속이었던 본지 1면은 총장 소식이나 학위수여식, 교수 초빙 등의 이미 일어난 교내 소식을 보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1954년4월12일 3호 1면의 머릿기사는 약1천명의 신입생들에 대한 소개다. 신입생 중 사업을 하는 부모님을 둔 사람과 이화여고를 졸업한 사람이 많다는 내용의 환경조사 기사도 함께 실렸다. 제주도에서 1명이 진학했다는 사실을 부제목으로 선정했다. 1955년5월25일자 12호 1면에는 당시 김활란 총장이 국제선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알리는 내용도 보인다.

‘이화의 눈’이라는 제목의 1면 사진 코너에서도 교내 행사 소식이 주로 다뤄졌다. 1969년11월17일자 386호에 실린 기숙사 동계 대비 김장 행사, 1962년11월26일자 152호에 실린 휴웃길(운동장에서 포스코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르다 보면 힘들어 ‘휴웃’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다) 시화전과 같은 행사 사진이 주로 실렸다.

본지에서 여성 문제는 언제나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특히 여성 교육이 보편적이지 않던 50~60년대에는 입학․졸업철에 여성 고용과 교육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기사가 많았다. 1958년12월1일 40호 1면 기사에는 총장 공관에서 열린 전국 여고교장 간담회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여성교육에 대해 토론하며 대학과의 유기적 협력을 강조했다는 내용이다. 1968년6월3일 336호 1면 머릿기사는 ‘공업화에 따르는 여성상 부각’을 제목으로 한 국제 여성세미나 기사였다.



○ 민주화 바람이 부는 1970~80년대

70~80년대 본지 1면에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1974년9월27일 521호 1면에는 군부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 과정에서 지명수배 및 구속된 본교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채플에서 진행된 서명운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1975년9월5일 540호 1면 기사는 정부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생회를 폐지하고 학도호국단을 설치한 사실을 다뤘다. 총장이 직접 학생을 징계할 수 있고 집회와 외부 강사 초청에 허가가 필요하게 된 학칙 개정의 내용도 포함됐다.

매주 간행되던 신문은 5월17일 계엄포고령10호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발행 중지되기도 했다. 1980년9월15일 669호 1면 기사 중에는 ‘116일 만에 개교로 학사일정 대폭 조정’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학교가 문을 닫아 진행하지 못했던 시험 일정을 조정하고, 법정 최저수업일수를 맞추기 위해 일요일, 공휴일도 수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던 해, 8월31일 845호에서는 8․15 민족해방기념대회에 참가하다 단순시위 가담혐의로 구속된 임미애 총학생회장을 1면 기사로 다뤘다. 임씨 석방 운동에 관한 기사는 3호 연속 1면을 차지했고, 9월21일 제848호에 석방 소식이 실렸다. 같은 호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발족에 관한 기사도 같은 호 1면에 실렸다.



○ 교내 문제에 집중…학교 앞 상업화를 반대하는 1990년대

1990년대 문민정부에 접어들면서 학생운동의 목표는 군부 독재를 대상으로 한 사회 문제에서 학내 문제로 전환기를 맞았다.

가장 큰 주제는 등록금이었다. 1995년3월6일자 1031호 1면 기사는 개강 후 15일까지 등록금 납부가 유보된다는 기사였다. 총학생회와 학교가 등록금 납부일이 지나도록 협상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0년3월27일자 1154호 1면에는 당시 이지수 총학생회장과 김선영 부총학생회장의 삭발식 기사가 실렸다.

학교 앞 상업화가 본격적으로 이슈화 돼 학생들이 반대 운동을 시작한 것도 90년대다. 1994년11월21일 1029호 1면에는 ‘학교 앞 상업문화 추방시위’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본교 학생과 주변 시민들이 힘을 모아 학교 앞에 개장하는 럭키프라자(현 오렌지마트 건물) 불매운동도 진행했다.

1998년11월9일자 1122호의 1면은 고층 빌딩이 가득한 학교 앞 풍경을 그린 그림이 채웠다. 당시 기자가 세운 가상 시나리오지만 지금의 학교 앞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친구를 학교로 초대했더니 이대역 앞에서 학교가 보이지 않는다고 의아해했다는 일화는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상업화가 진행 중인 학교 앞을 비판하는 일화로 쓰였다.



○ 수업권 투쟁의 2000년대

2000년대에는 학생들의 수업권이 침해받는 현실이 자주 보도됐다. 2008년9월1일자 1336호 1면 기사는 ‘경제학과, 교수부족에 학습권 위협 시달리는 학생들’이었다. 경제학 전공생이 1천11명인 데에 비해 정교수가 12명으로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타대에 비해 현저히 많아 학습권이 보호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도했다.

2011년10월4일자 1409호 1~2면 기사로 ‘경제학과, 과목 당 수업 시수 모자라 진도 절반만 나가’로 1336호 기사와 연관된 후속 보도가 실렸다. 1336호에서 제시된 교수 수 증원 방안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학생들의 불편이 계속된다는 점도 보도했다.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기획 기사가 늘어나는 모습도 보였다. 2008년9월8일 1337호 1면 기사는 ‘실용적으로 변하는 사회봉사활동’이라는 제목으로 봉사활동 인증제가 시작되면서 이화인들이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획기사였다. 2010년5월3일 1376호 1면 기사도 이화인의 스마트폰 활용에 대한 ‘4인치 스마트폰, 이화인의 삶 디지털화하다’라는 제목의 기획기사였다.

본지는 2000년대에 시작된 조선․중앙일보 등 언론사의 대학평가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해왔다. 2011년5월30일 1402호 1면에 실린 ‘아시아 대학평가, 본교 국내대학 중 7위’에서는 대학평가제가 경쟁을 조장하고 부당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9월19일 1407호 1면에 실린 본교 5개 학과가 최상위 평가를 받은 중앙일보 대학평가 기사에서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고해강 기자 boxer@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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