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 (聖學十圖)>는 퇴계가 성리학의 요점을 정리하고 여기에, 요즘 같으면 ‘파워포인트’에 해당할, 도표를 첨부하여 왕에게 올린 글이다. 그 핵심은 수신(修身)이다. 특이한 것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면서, 거의 전적으로 개인적인 수양에만 중점을 두고 정치나 정책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신자(受信者) 선조가 갖 왕위에 오른 16세의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정치 이전에 인간적 바탕을 닦는 것이 교육의 순서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16 세의 소년이 외국어로 쓰인 이 글을 놓고 수련하는 것은 요즘 대학 입시 준비공부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의 경우만큼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에 대한 고려 이전에 이 글이 논하는 것은 두루 인간의 심신 수련의 문제이다. 그 원전이 되는 글들의 뜻도 그러하다. 유교의 정치 이상은, 남쪽을 향하여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저절로 잘되어 가는 세상이다.

    농사짓는 세상에서 임금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앉아 있는 임금이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장기 계획의 문제가 아니라 평상 상태의 문제이다. 천지와 세상의 이치 그리고 그에 맞추어 마음을 다져 가는 성학의 매뉴얼이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데 대한,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으로 끝난다는 것이 이것을 잘 나타낸다. 수양하며 하루를 사는 요령에는 고상한 가르침만이 아니라 몸단장이나 몸가짐과 같은 하찮은 일에 대한 지침이 들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머리 빚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바르게 하며, 잠자리에 들 때에는,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은 자세로 자도록 하여야 한다. 수신(修身)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듯이 마음의 수양에 몸을 닦는 것이 주요한 방편이 된다는, 심신의 일체성에 대한 통찰이 이러한 지침에 들어 있다. (심리학에서 감정의 제임스-랑[James-Lange]이론 이라고 불리는 관찰에서도 같은 생각을 끌어 낼 수 있다.) 또 이러한 세부에 대한 주의는 그때그때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정신 수양의 핵심이라고 하는 생각에 관련된다. 수양은 늘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고 한 가지 일에 집중케 하는 것을 익히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하나에 집착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있으면 일을 처리하고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을 살고 그때그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수를 한다면 세수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순간의 일에 따라 흘러가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 속의 삶의 흐름에는 질서가 있다. 삶은 자연스러운 시간의 리듬에 따라 진행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태양의 밝음을 받아드리고 적절한 휴식으로 스스로를 회복하고 밤이면 생각을 버리고 밤기운으로 하여금 마음을 기르게 하여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

  지금의 이 순간에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찰라주의를 옹호하는 것인가? 오늘을 재미있게 사는 것-- 환락의 삶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가장 좋은 삶이란 말인가? 또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이런 속담이 말하는, 천리 길 다음의 소득을 목표로 오늘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인가? “숙흥야매잠”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공리주의보다는 가능한 인간적 성실성의 삶을 오늘 한 순간에 사는 것--그것을 정신적 질서 속에 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결국은 보다 큰 지혜에로 나아가고,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요즘 말로, ‘성공’을 가져 온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그러한 결과에 이르지 않고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여도,  그 자체로서 보람을 가져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간을 제외하고 과거와 미래 어디에 사람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일까? 유학이나 불교의 지혜는 오늘의 시간의 절대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한 것이다. 물론 오늘의 성실한 삶은 미래에 대한 고려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 미래의 현실은 오늘의 성실에 따르는 은혜로운 선물일 뿐이다. 이것이 성학십도의 좁혀진 시간이 의미 하는 바가 아닐까 한다. (이런 현재 시간의 의미에 대한 비슷한 해석이 중세 기독교의 ‘시간의 기도서 [Stundenbuch]’에도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르침은 앞으로의 성공을 위하여 날고 뛰는 것이 창조적인 삶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공부도 오로지 미래의 성공을 겨냥하는 것이 되어 있다. 정치도 지금에 하는 좋고 나쁜 일 전부를 추상적인 이념으로 정당화한다. 현재 속에 미래가 어떻게 새겨져 야 하는가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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