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 알랭 레네 <사랑해, 사랑해>
▲ 오손 웰즈 <시민 케인>

시간은 매 순간 현재와 과거로 분기된다. 결정-이미지는 시간이 이처럼 탄생하는 지점을 품고 있다.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이 점을 살펴 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시간의 분기가 뻗어나가서 양 극단에서 시간이 정초되는 풍경, 시간이 누적되어 펼쳐지는 두 가지 평면을 살펴보려고 한다. 요컨대, 순수한 시간-이미지는 두 가지 면 위에서 형성된다.

한편으로, 과거는 끊임없이 불어나면서 그 자체로 보존된다. 들뢰즈와 베르그손에 따르면, 기억은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우주적이다. 우리가 갖는 회상-이미지는 과거 자체가 아니며, 정확히 말해 기억 또는 과거로부터 현실화된 것이다. 우주의 지속은 과거의 무수히 많은 층들로 차 있다. 이 과거의 층들은 현재와 함께 ‘동시간’적이다. 지금 보이지 않는 옆 방의 사물들이 내가 앉아 있는 방의 사물들과 공존(coexistence)하듯이, 잠재적 과거의 층들은 현재와 함께 내속(insistance)한다.

우리가 단번에 과거의 부피 안으로 뛰어올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층들 사이를 떠돌 때 잠재적 이미지가 주어진다. 이러한 과거의 층들 사이의 유랑이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의 구조를 이룬다. 세계적인 부호 찰스 케인이 외롭게 죽으면서 남긴 말 “로즈버드”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신문 기자는 그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차례 차례 만나 인터뷰한다. 과거의 다섯 개의 장면, 또는 다섯 개의 층은 서로 다른 케인의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들 사이의 차이, 불일치로 인해 (적어도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수수께끼의 답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탐색된 과거의 층들은 마지막 조각이 없는 퍼즐 조각들과 같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사랑해, 사랑해>(1968)는 이런 구조를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아간다. 타임 캡슐에 들어간 주인공은 기계 고장으로 인해 시간 여행에서 현재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과거 속에 갇혀 떠돌게 된다. 그는 과거의 한 장면에 단 몇 초만 머물 수 있을 뿐이어서, 장면의 전환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이러한 시간 유랑은 몽타쥬를 직접적으로 구성하고, 그가 애초에 자살하려고 했던 이유가 조금씩 밝혀진다. 흥미롭게도 그가 들어가 눕는 타임 캡슐은 뇌처럼 생겼는데, 이는 감독이 시간 속의 탐색을 통해 영화가 사유를 표현하고 자극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을 표시한다.

시간-이미지의 한 가지 차원이 이처럼 “과거의 층들”이라면, 다른 차원은 “현재의 첨점들”이다. 다만, 여기에서 현재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상식적인 시간의 세 차원 중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매 순간 주어지는 순수한 현재, 들뢰즈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사건의 내부의 관점에서” 본 현재를 말한다. 이를테면,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사건, 몇 백 년 된 오래된 고성의 돌계단 위로 바람이 불어오는 사건 같은 것들은 순수한 현재를 형성한다.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는 이처럼 모든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현재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 기억을 떠올린다 해도, 그것은 현재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알랭 레네가 감독을 맡고 알랭 로브-그리예가 시나리오를 쓴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1961)는 두 가지 시간-이미지가 뒤섞이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남자 X는 여자 A를 지난 해 만났다고 주장하는데, A는 X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다. 영상은 남자가 주도하는 나레이션의 음성과 불일치하고, 보여지는 장면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알 수 없도록 매우 불확실하게 진행된다. 이 영화는 과거의 층들을 탐색하려는 레네의 경향과 모든 이미지의 출현은 오직 현재와 관련된다는 로브-그리예의 믿음이 충돌하고, 이 때문에 영화 안에서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지난 번 글에서 말한 것처럼, 물체의 다양한 수준의 잠재적 이미지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그것들은 현실적 이미지와 분리할 수 없이 “합착”된다. 현실적 이미지와 그것의 잠재적 이미지는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하나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극단의 경우, 두 이미지는 어느 것이 현실적이고 어느 것이 잠재적인지 판별할 수 없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이라고 부른다. <마리앙바드>는 영화 전체가 이러한 식별불가능성의 모호한 안개 안에 붙잡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수히 많은 잠재적 이미지를 방출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운동-이미지에서 출발해 시간-이미지로 이어지는 궤적을 따라 영화들 사이를 여행했다. 왜 현대 영화가 난해하고 복잡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영화가 시간 속에서 방랑하거나 식별불가능성의 이미지들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것의 이유를 다시 묻는다면, 감독들의 답을 숙고해보는 것이 좋겠다. “일상에서 우리는 연대기적인 시간 순서에 맞춰 생각한다거나 정렬된 논리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보지 않는다.”(알랭 레네) “이 영화를 보고 명확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열정에 대해 뭔가 늘 불확실하고 불명확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알랭 로브-그리예) 현대 영화의 과제는 바로 정서들이 가득 찬 시간의 미로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화인문과학원 이찬웅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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