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다. 선선한 날씨는 어느새 사라지고, 푸르렀던 잎사귀들은 노랗고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도 두툼한 옷을 걸쳐 입고 옷자락을 여민다. 양 볼에 찬 기운이 스쳐가는 걸 보니 겨울인가 보다.

‘겨울’이라 하면 떠오르는 게 많다. 추운 날씨를 견딜 목도리와 장갑, 따뜻한 호빵과 어묵, 눈사람, 크리스마스……. 떠오르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나는 ‘사랑’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고 싶다. 겨울에 만나는 사랑은 빨간 사랑의 열매와 같은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는 연민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 나누는 우정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연애’일 것 같다.

그 때문일까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남자친구 안 만들어?”라는 협박성이 가미된 충고를 보내고 있다. 필자뿐 아니라 이맘때면 많은 이들이 듣는 이야기이자 고민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본래도 목숨 걸고 애인을 만드는 타입이 아니라 특별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대신, 나는 예술과 연애중이다.

예술계에서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맘때는 유독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올라온다. 필자는 근 두 달 동안 7편의 공연을 보았는데, 그 중 4편이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으니 그야말로 사랑이 꽃피는 시기라 하겠다.

그래서 이번 글에는 예술과 연애 중에 만난, 혼자 간직하기 아쉬운 작품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10월 말, 국립발레단이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제목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사랑이야기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버전을 초청해 색다른 현대발레로 풀어냈다. 로미오에게 뺨을 때리고 먼저 키스하는 줄리엣은 고전에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적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을 이어주는 역할의 로렌스 신부는 보다 비중이 커져 극의 흐름에서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역할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이 공연은 기존의 발레에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과감히 삭제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구성해 보는 내내 관객을 무대로 빨려 들어가게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핵심인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정명훈의 지휘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관객의 감성을 폭발하게 했다.
다소 쌀쌀했던 11월 첫째 주에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왓 어바웃 러브>가 공연됐다. 제목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품이었다. 작품을 만든 프랑스 안무가 조엘 부비에는 국내에서 한국의 무용수들과 함께 대면하고 소통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때문에 안무가의 프랑스적 특징과 함께 한국인의 정서가 가미되어 친근함과 함께 프랑스적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풍선이나 깃털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해서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끊임없이 던져주고, 목소리를 내거나 마이크를 두드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장소리를 표현하는 등 다양한 방법의 효과음을 사용해 '무용'이라고 명확히 범위를 정할 수 없는, 관객에게 넓은 시각을 보여준 공연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 유니버설발레단이 올린 <오네긴>은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오네긴>을 발레로 만든 작품이다. 타티아나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한 오네긴이 훗날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 타티아나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반해 청혼하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네긴의 귀족적인 풍채와 무대에 반영된 시대의 모습이 주목해볼만하다. 이 작품의 백미는 3막의 마지막 파드되(2인무)인데, 사랑을 간구하는 오네긴의 애절함과 그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타티아나의 오열이 더해져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거창한 공연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예술이 감성을 전하고 있다. 예술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피아노 연주를 보면서 우리가 감동을 받는 건 연주의 테크닉만이 아니라 그 음악이 우리의 가슴에 무언의 울림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을 넘어서 느끼는 것, 그리고 그 느낌이 더하고 더해져서 완성되는 것이 예술이다. 올 겨울에는 시린 옆구리 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줄 예술을 만나보면 어떨까. 예술과 연애하는, 머리가 쭈뼛 서고 가슴이 저릿하게 울리는 감동을 느껴보자.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