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영화보기5> 이미지의 이중화
<들뢰즈와 영화보기5> 이미지의 이중화
  • 이화인문과학원 이찬웅 HK연구교수
  • 승인 20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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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셀리니의 <유로파 51>(1952)는 일상적인 감각-운동 도식의 중단과 그로 인한 새로운 이미지의 출현을 보여준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한 이렌은 부유한 결혼 생활에 취해 있다가, 자신의부주의로 인한 어린 아들의 죽음 때문에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그녀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상담과 치료를 거치며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동네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치유의 희망을 발견한다. 일군의 노동자와 함께 공장에 들어선 어느 아침, 그녀는 생소함과 놀라움을 담은 눈으로 공장의 거대한 벽들과 기계들의 작동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영화는 갑자기 공장의 일상적이고 외면적인 모습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공장은 더 이상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 대신 주인공이 바라보는 장소는 그 부분들로 분해되고, 추상 회화에서처럼 외연적인 의미는 거의 상실하면서 몇 가지 선과 특징으로 축소된다.

이처럼 이미지가 일상적인 연쇄에서 일탈해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현대 영화 또는 시간-이미지의 대표적인 표지이다. 일견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들이 빈곤해보일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유용성으로 이어지는 관습적인 자동기제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덕분에 이미지는 대상의 더 심오한 측면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행동-이미지를 차단하고 정신의 영역으로 이미지를 끌어올리려 했던 것이 유럽 현대 영화의 과제이자 전략이었다. 요컨대, 얇은 화장지가 두 겹으로 나누어지듯이, 이제 이미지는 이중화된다. 현대 영화가 보는 자들의 영화라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현실적인 이미지 안에서 또는 그 이면으로 잠재적인 비전(vision)이 어렴풋하게 비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운동-이미지의 위기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로 클리셰(cliché)의 범람과 편재를 언급한 바 있다. 이 위기 이후의 과제는 이제 “어떻게 하면 클리셰를 멈추고 진정한 이미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의 주위에 놓이게 된다. 클리셰란 감각-운동 도식 안에 놓인 일상적이고 관습화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반면 새로운 이미지는 잠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언제나 클리셰 안으로 추락할 위험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좀 더 보편적인 경험의 수준에서 말하자면, 이런 문제인 것이다. 외국의 어떤 도시를 여행할 때, 관광엽서나 익숙한 구도의 사진들의 덫을 피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사진 또는 스케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한 시각적 이미지는 시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운동의 합성을 통해 시간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직접적으로 현시한다. 고전 영화에서 몽타주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재현했다면, 이제 현대 영화에서는 쁠랑-세캉스(plan-sequence)가 시간의 지속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이 점과 관련하여 오즈 야스지로는 하나의 전환점이었으며, ‘시각기호’와 ‘음성기호’의 발명자였다. 그의 영화는 산책과 여행을 통해 구성되고, 가족사 내의 평범한 일상을 그 내용으로 삼고, 등장인물의 모습과 말을 순수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스타일은 50년대 전후 유럽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양 고전 영화의 문법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던 그의 많은 장면들 중 <만춘>(晩春, 1949)의 후반부를 살펴보자. 홀로 된 아버지와 이제 결혼을 결심한 딸이 마지막 여행 중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대화가 멈춰설 즈음 영화는 갑자기 창문 아래에 있는 꽃병을 두 차례에 걸쳐 십 초간 보여준다. 달빛 아래 흔들리는 그림자가 그 위로 어릴 때, 그 꽃병의 지속은 우리에게 시간의 견고함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철학적 전환이 놓여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인상적으로 전개하고 있듯이, 우리의 상식은 시간을 공간에 근거해 파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시간을 도처에서 느끼지만, 막상 시간이 어디에 있는지 가리킬 수 없는 걸로 미루어 보건대, 시간은 운동의 규칙성 내에 들어 있으면서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가장 이상적으로 유지되는 규칙적인 운동, 이를테면 행성의 운동 같은 것에 맞추어 측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시간 그 자체가 어떤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려 한다. 시간은 공간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고 풀려난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사에서 이러한 전환은 칸트가<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의 두 형식을 공간과 시간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내세웠을 때 도래했다. 영화사 안에서, 그러한 거대한 전환이 오즈의 꽃병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화인문과학원 이찬웅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