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김현식의 거친 목소리와 애절한 가락이 다시 맴도는 가을, 몇 잎 낙엽이 남아 뒹구는 어느 골목을 나는 지난다. 골목, 둘러보아도 돌아보아도 드문 흔적만이 어슴푸레 깔려 있고, 허름한 보도블럭 사이로 뿌연 먼지구름이 솟는 그곳. 그래서 나는 좋다. 왠지 모를 편안함, 야트막한 담장이 나를 감싸고 이리저리 마주치는 기울어진 대문들이 무진장 반겨줄 것만 같은 그곳, 커튼이 쳐진 연인의 창가가 아니라도 그곳은 포근하다.

골목어귀를 지나 광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제는 엄청 커져버린 그곳, 광장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트인 공간이 된 지 오래다. 왜 그런지 걸음이 불편해진다.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 순종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함, 뒷걸음치면서 저항하고 싶은 갈증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보잘 것 없는 근대인의 자기불만일까, 아니면 부질없는 욕구에 대한 일말의 기대일까? 뭔지 모를 무겁고 차가운 바람이 방금 골목에서 튀어나온 내 그림자 위에서 출렁거린다.

광장, 그곳은 역사의 흐름이 면면히 휘감아 돌아나가는 곳. 뜨거운 함성과 감동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곳. 보다 나은 시대를 갈구하는 열망이 끓어오르고 서로를 나누는 인간 공동체가 운집하는 곳. 프랑스혁명의 뿌리를 지탱했던 콩코드광장도, 민주화항쟁을 지켜본 서울역광장도, 독재타도의 상징이 된 이집트 타흐리르광장도 모두 그런 곳이리라. 그리고 기술과 사회의 진보는 그런 광장에 흡인력과 폭발력을 더해 주었다. 그래서 역사는 늘 광장을 거쳐 가나보다.

인간다움과 삶의 질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 점점 커지면서 광장은 모두의 바람을 표출하는 “승인된 공간”이 된 지 오래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것으로 다가간다. 때론 신명나는 잔치, 흥분의 축제가 벌어져 그들을 즐겁게도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광장은 역사의 멍석처럼 오늘도 그 자리에 깔려 있다. 광장은 원래 그런 곳이었지. 광장문화는 우리의 생활표준이 되었고 어딜 가나 통용되는 근대의 상징이 되었기에, 차가운 내 머리는 저 광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광장에 다가설 때마다 나는 왜 불편해지는 것일까? 광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왠지 모를 고독감과 상실감,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덮친다. 혹시 근대의 안락함 속에 안주해온 소시민의 쓸데없는 기우 따위가 아닐까? 내심 위안을 해보지만 수많은 군상들이 운집해 있는 그곳은 여전히 나의 자리가 아니라고, 내 가슴은 외친다. 그럼, 역사가 만들어지는 저 광장 한 귀퉁이에 비껴서 있어야만 하나? 가슴은 머리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나 보다.

그렇지, 광장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것 때문일 거야. “바로 나,” 골목 안에서 안락함을 느꼈던 나는 광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표준화된 인간, 정형화된 개인, 정당성의 위세에 짓눌린 초라한 나로 바뀌고 만다. 광장은, 변화를 외치는 처절한 구호가 깃발에 나부끼는 곳. 무대 위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영웅들이 만들어지고, 열광하는 군상들은 꾸역꾸역 밀려든다. 광장은 그들에게 인자하지만, 그곳에는 어긋남이 없다. 골목길을 휘저으면서, 누가 보든 뭐라 하든, 나 홀로 만끽하던 호젓함과 자유분방함, 그런 것이 광장에는 없다. 때론 휘발성 강한 그곳에서 관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좀 모자란 사람들에게, 광장은 무섭다.

골목에서는, 가끔씩 시원찮은 놈들끼리 낄낄거리며 알량한 자존감을 채우기도 하고, 남이 안 보려니 불량한 짓도 망설이지 않곤 한다. 그리고 내 일 네 일 없이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익숙해져온 “바로 나”의 모습, 광장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사람 냄새보다 아스팔트 냄새가 더 코를 찌르는 그 광장에서 말이다.

불편함은 그로부터 오는가보다. 근대문화의 상징으로서 광장은,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성장해온 골목세대들에게 낯설다. 그럼에도 시대는 흐르고 그들 세대는 광장이란 곳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것은 머리부터였다. 머리는 광장을 향하지만, 발걸음이 망설여지는 것을 보니 가슴은 아직 아닌 게다. 근대의 프로젝트라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광장으로 나아가 힘없이 군중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바로 나”의 모습. 그런 아쉬움과 망설임이 아직은 가슴 속에 남아 있나 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광장으로 난 골목어귀에서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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