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영화 철학의 체계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의 체제가 그것이다. 이는 영화사에서 일반적으로 고전 영화와 모던 영화라고 부르는 구분에 대략 상응한다. 시기상으로는 이차대전 전후, 그러니까 1940년대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 그렇긴 하지만, 들뢰즈는 두 영화-이미지 체제의 구분을 역사적인 것 또는 사회사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이를테면, 이차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정신적 왜소감이나 빈곤한 물질적 토대) 미학적인 관점에서 규정하고자 한다. 운동-이미지가 감각-운동적 연쇄를 통해 규정된다면(지각-변용-행동), 그것의 작동이 불안정해지고 그 내적 연결이 이완되는 지점에서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 체계 안에서 히치콕의 위치는 이중적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운동-이미지를 완성하는 동시에 운동-이미지를 지나치나면서 그것의 위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가 된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연기와 소품 등을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통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들의 연기의 자유도는 극도로 축소되고,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요구되는 지각과 행동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 머문다. 대신 히치콕 영화의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은 관객을 영화의 필수적인 한 요소로 통합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언제나 등장인물보다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서스펜스는 이 간격에서 나온다. 즉, 주인공은 관객이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에 무지한 채 위험을 자초하는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이처럼 지각, 변용, 행동으로 이어지는 감각-운동 도식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데 그의 영화 중 몇 편의 영화는 이 도식에서 벗어나는 의미심장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창>(1954)이나 <현기증>(1958)과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이창>을 떠올려보자. 주인공은 다리가 부러진 채, 건너편 아파트가 보이는 창에 꼼짝없이 누워있다. 그는 이제 살인 사건을 목격할 운명에 놓여 있지만, 영화 내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앞서 우리는 히치콕이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사건으로부터 물러나 관객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수동성, 무능력은 지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를 의미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미지 위기의 일반적 특징을 다섯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이미지에 담긴 상황은 더 이상 종합적이지 않고 분산적이다. 알트만의 <내쉬빌>(1975)은 많은 인물 사이에 어떤 무게 중심도 거부하고 여러 사건들을 병렬적으로 진행시킨다. 둘째, 사건들 또는 공간들을 잇는 연결의 선들이 부서진다. 셋째, 행동 대신 산책이나 여행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예를 들어, <택시 드라이버>(1976)의 방랑. 넷째,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클리쉐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이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 듯 보인다. 다섯째, 거대한 음모와 공모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점이 드러난다(시드니 루멧의 영화들).

이러한 운동-이미지의 위기, 그러니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의 부재, 무능력 뒤로 어떤 이미지가 가능한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 바그를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바로 "순수 시각 이미지의 등장"이다. 등장인물들은 누추하고 끔찍하고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해결의 방법이나 의지 없이 단지 세상을, 세상의 부분들을 ‘바라볼’ 뿐이다.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등장인물들은 그 사건이 자신과 별 상관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아이나 노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비참한 환경에 맞설 수 없는 능력도 위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어, 비토리오 데 시카의 <움베르토 데>(Umberto D, 1952)에서 하숙집의 가난한 하녀는 새벽에 잠이 깨 부엌으로 들어와 습관적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한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배를 만지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카메라가 다가설 때 그녀는 이런 상황을 속으로 비관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시선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장면은 새로운 이미지, 즉 순수 시각적 이미지의 등장을 압축한다. 다른 예로,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1948)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황량하고 심지어 비열하기까지한 세계를 어떤 판단 없이 ‘순수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각은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행동의 부재가 단순한 패배나 무능력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지난 번 글의 두 번째 단락, 두 번째 문장에서 "변용-이미지가 리얼리즘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 것은"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변용-이미지"는 "행동-이미지"를 잘못 적은 것입니다.

이화인문과학원 이찬웅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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