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북동, 사색의 옛길을 걷다
2. 문인의 기억, 인생 그리고 문학관
3. 이상의 집터에는 ‘날개’가 없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란 말처럼, 가을은 날씨가 서늘해 글을 가까이하기 좋은 계절이다. 가방을 가볍게 메고 근처에 있는 문학 공간을 찾아가 보자. 본지는 ‘문학만보’를 통해 가을을 맞아 성북동, 종로구의 근현대 국문학의 산실, 사라진 문인의 집터를 되새겨본다. ‘만보’는 ‘한가로이 거닐다(漫步)’와 ‘만 가지 보물(萬寶)’이라는 뜻이 있다. 문학만보는 세 번의 기행을 통해 보물과 같은 우리 문학의 흔적을 찾아 거닌다.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중심으로 스트랫포드 어펀 에이번(Stratford-upon-Avon)이 셰익스피어의 도시로 꾸며져 있고, 아서 코난 도일은 소설 「셜록 홈스」의 배경이 된 곳까지 보존됐다. 이들의 흔적을 보기 위해 매해 많은 관광객이 도시를 찾는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떨까? 문학만보 세 번째 기행은 이전 기행과 달리 보존되지 못한 문인의 흔적을 좇는다. 현진건, 박목월, 김수영, 이상…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우리네 작가들의 집을 찾아가 본다.

 

잡초만 무성한 부암동 현진건의 빈 처(處)

 부암동 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내려 무계정사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빈 공터가 있다. 사유지 주인이 남긴 ‘경고 들어가지 마셰(세)요, 파손 시 배손 요망’이라고 적힌 쇠파이프가 집터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그 아래에는 누군가 와서 소유주에게 쓴 욕설이 있다. 검은 개만 녹슨 줄에 묶여 황량한 공터를 지킨다.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있고, 300년 된 은행나무 아래 온갖 쓰레기와 건축 폐자재가 얽혀 폐허가 돼 있다. 빙허(憑虛) 현진건의 집터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언어영역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작이다. 현진건은 하층민의 삶과 민족적 현실을 반영한 「빈 처」, 「술 권하는 사회」 등을 썼다. 그 중 「무영탑」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비극을 사회적 모순의 결과로 해석한 작품으로, 현진건이 부암동 집에서 완성했다.

 현진건은 1936년 ‘일장기말살사건(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 사회부 부장 현진건, 사진부장 신낙균 등이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건)’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일을 모의했던 장소 또한 이곳이다.

 2003년 11월 집이 철거된 후 문화재 보존에 대한 목소리가 일자 종로구는 소유자와 부지 매입을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부지는 텅 빈 채로 여전하다. 토지가 2층 이상의 건축이 불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에 건축하기로 했던 빌딩이 지어지지 못한 것이다.

 ‘(전략)…팔작지붕 겹쳐마 안방 툇마루/다 사라져버린 텅 빈 집에 봄은 오고…(중략)/무영탑만을 보듬고 살던 선생의 부암동 고택을/포크레인으로 한순간에 허물어 버린/그 문화 일등구에서 나는 빙허를 마신다…(후략)’

 시인 조정애가 현진건의 집터를 보고 쓴 시 「현진건의 쑥국」이다. 무려 ‘종로구 골목길 관광 코스’에 포함된 현진건 집터, 그곳에는 집도, 현진건도 없다.

 

박목월의 낡은 집을 감싸던 대추나무는 뽑혔다

 ‘머언 산 청운사/낡은 기와집/산은 자하산/봄눈 녹으면/느릅나무/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청노루/맑은 눈에/도는/구름’

 박목월이 「청노루」를 노래했던 원효로 4가의 2층짜리 양옥집은 2004년 2월21일 유족들의 의사에 따라 철거됐다. 이 집은 박목월이 1960년에 지은 집으로 뜰에는 그가 직접 심은 사철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자랐었다. 1층은 서재로 사용됐고 2층에는 책과 자료가 보존됐다. 그는 1965~1978년 이 집에서 「경상도 가랑잎」,「사력질」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박목월은 청록파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여러 곳에서 그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다. 1999년 원효로3가 하이트 맥주 빌딩 옆에는 박목월을 기념한 소공원이 세워졌다. 이보다 앞선 1993년에는 한양대, 1992년에는 낙동강 등에 박목월의 시비가 건립됐다. 정작 그가 살던 집은 보존되지 못하고 포크레인에 헐려 딱딱한 대리석 건물로 바뀌었다.

 2003년 현진건의 집이 헐린 후 서울시에서는 근대 문인의 유적에 대한 보존 작업이 추진됐다. 유족들은 집을 보존해 기념관 등을 건립하고 싶어 했지만 빚을 못 이긴 박목월의 장남 서울대 박동규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집을 허는데 동의했다. 집이 헐린 후 그 자리에는 지상5층의 다가구 주택이 들어섰다.

 현재 박목월 집터를 나타내는 표지판은 어디에도 없다. 근처 주민과 부동산의 도움을 받아 물어물어 찾은 집터는 ‘청노루 힐’이라는 건물로 남아있었다. 부동산 담당자에 따르면 문인협회 등에서 건물 앞에 「청노루」라는 시비와 표지석을 세우고 ‘청노루 힐’이라는 건물 이름을 짓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근처에 거주하는 이신영(교육학·11)씨는 “이름을 대면 모두 아는 문인의 집이 보존되지 않고 쉽게 헐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정부가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탑골공원을 등지고 서 있는 김수영의 표석을 보다

 종로3가 역 1번 출구에서 나와 탑골공원 3.1문까지 걸어가면 앞에 놓여 있는 신호등이 보인다. 신호등을 건너면 어학원이 서 있는 데 그 맞은편에 ‘김수영 생가터’라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있다. 종로2가 56-17호 김수영의 생가 터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중략)/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은 「풀」,「눈」,「사령」등의 시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그의 저항 정신을 전했다. 특히 그의 시 「풀」에서는 바람에 굴복하지 않는 민중의 끈질긴 저항 정신이 잘 드러난다.

 생가 터 표석은 꼿꼿한 그의 저항 정신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표석은 찻길의 자동차에 가려져 바쁘게 오가는 시민들의 눈길 한 번 받기 힘들다. 3.1절의 함성이 가득 찼던 탑골공원을 등진 표석은 쓸쓸하다.

 김수영 집터 표석은 한 번 이사했다. 처음에는 그의 거주지로 알려진 종로6가 116번지 골목 길 안쪽에 설치됐지만 유족의 요청으로 2009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종로6가 116번지 역시 보존돼있지 않다. 그 앞에는 표석을 떼어낸 흔적만 남아있다.

 원래 22평 단층 한옥이었다고 하는 김수영 거주지는 보존할 기회가 있었다. 현진건 고택 철거 논란 후 문화재 지정이 추진되던 2004년 2월, 김수영 거주지는 현장조사까지 마쳤었다. 하지만 3월 폭설로 거주지가 무너져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를 박건희 문화재단에서 매입해 ‘대안공간건희’로 활용했지만 현재는 운영되고 있지 않다.

 ‘(전략)…그리고 나와 같은 집없는 걸인이여/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검은 바람이 들어온다고 외쳐라/너의 머리 위에/너의 몸을 반쯤 가려주는 길고/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

 김수영의 「가옥찬가」다. 그의 양철 채양이 달린 집은, 이젠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상 집터

통인동 조용한 집터에서 이상을 새기며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의 집터에는 성인업소 명함, 전단지 등이 버려져 있었다. 집터에 내려진 셔터 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통인동 154-10 이상의 집’이라는 녹슨 철제 글자가 작게 붙어 있다. 철제문 앞에는 ‘행사가 종료되었습니다 추후 더욱 좋은 프로그램으로 찾아뵙겠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부착돼 있다.

 이상은 「오감도」,「거울」등 27년의 생애 동안 약80편의 작품을 남긴 건축가,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작년은 이상(본명 김해경)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던 해였다. 영인 문학관에서는 ‘이상의 방’을 만들고 그의 유품을 전시해 이상을 추억했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중략)/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거울」이다. 이상의 글은 문법이 맞지 않고 띄어쓰기가 돼 있지 않는 등 난해한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는 현대인의 고뇌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해 단연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 문인으로 꼽힌다.

 이상의 집터는 2004년 9월 서울시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었다. 그러나 1940년에 이상의 집이 철거되고 세워진 한옥이 그의 집이 아니라고 알려지면서 2008년 6월에 지정이 말소됐다. 이상이 1912년~1932년 살았던 이 집터에는 작년까지만 해도 학원 등의 공간으로 쓰였지만 2007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집터를 매입하면서 철거됐다.

 올해 이상의 집터는 문화재단 아름지기의 지원을 받아 예술공간으로 부활했다. 4~5월 ‘이상과의 대화’라는 표제를 걸고 건축가 장영철, 설치미술가 유영호 등이 작품 활동을 펼쳤다. 원래 활동을 마친 후 6월에 철거해 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현재 아무런 공사도 진행돼지 않고 방치된 상태다.

 문화재단 아름지기 신지혜 담당자는 “현재 보유한 땅이 이상이 실제 살았던 땅의 1/5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20평 정도를 더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당장 건물을 빨리 건축하는 것보다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의 접근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옥을 철거해 기념관을 짓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서촌주거공간연구회에서 활동 중인 서울대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 교수(국어교육학과)는 “현존 한옥에서 색다른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이 이상의 ‘창의성’과 ‘예술 융합’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역사성, 문인이 살았던 시대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므로 철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중략)…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집은 삶이자 기억이다. ‘날개’가 없는 이상의 집에는 작품 「날개」만 남아 독자의 겨드랑이를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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