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수상해 어쩌다 밤늦게 택시를 탈 때면 마음을 졸이게 된다. 초초하게 창밖을 쳐다보다가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문득 스릴러 영화의 끔찍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간다. 그러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안도감과 동시에, 기사 아저씨를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성폭행, 성추행 관련 사건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일명 ‘몰카’를 비롯, 점점 범죄 수법도 예상을 뛰어넘어 천차만별이 되니 아무래도 몸을 사리게 된다. 비단 미디어 안의 일만도 아니다. 자취하는 친구로부터 도시전설처럼 학교 주변 ‘변태이야기’를 듣거나, 지하철에서 몇 차례 기분 나쁜 일을 목격하다 보면 이 땅에서 정말 조심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영화 ‘도가니’가 흥행몰이를 하면서 우리사회에 성범죄에 대한 의미 있는 공론이 진행 중이다. 인화학교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이뤄지고, 아동성범죄 공소시효 철폐에 관한 논의도 진행되면서 모두가 성범죄의 심각성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일회적인 ‘공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법적인 개선까지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범죄자들의 처벌 수위가 높아짐과 동시에, ‘생활 속’ 성범죄에 대한 인식 역시 진화하고 있나. 많지는 않지만 종종 성범죄에 대해 ‘일부는 여자 책임일 수 있다’는 의견도 보이는 것 같다. 성범죄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여자의 행동을 문제 삼는 것이다. 가령 젊은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됐을 경우 우선 ‘옷을 지나치게 짧게 입지는 않았는지’, ‘평소 행실이 단정치 못했던 것은 아닌지’, ‘의도적이었던 건 아닌지’ 등의 사전 심사를 거쳐야만 ‘무고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식이다.

 이는 피해자에게는 도리어 ’원인 제공자‘라는 혐의를 씌우는데 반해, 일부 가해자는 ‘본능적으로 시각에 취약한 동물’이라며 변명의 구실을 만들어주는 꼴이다. 사회 저변의 억압적인 성의식과 함께,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고대 의대생 성폭행’ 사건 이후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는 학생이 실시했던 “피해자는 평소 사생활이 문란했다. 아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설문조사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외국에도 유사한 논란들이 일었다. 작년 4월 워싱턴 소재 아메리칸대학(AU)에서 성폭력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한 남학생이 학보에 ’사교파티 중 여성이 데이트 상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면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칼럼을 게재해 논란이 된 것이다. 지난 1월에는 캐나다에 있는 요크대학의 ‘안전교육’ 강연에서 한 경찰관이 “여자들이 성폭행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매춘부(슬럿·Slut)처럼 옷을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발단이 되어 Society teaches "Don't get raped" rather than "Don't rape"라는 피켓을 든 ‘슬럿 워크(한국식 번역 ’잡년행진‘)’ 시위가 시작됐다.

 성범죄는 죄질을 입증하고 처벌 정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 무척 애매한 범죄라 한다. ‘어디까지를 성추행으로 보아야 할지’, ‘쌍방 합의에 관한 문제를 어디까지 인정할지’등 필자를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범죄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성범죄에 대한 지식과 사회적 논의가 미비하니 엉뚱한 곳에게로 화살이 튄다. 동시에 날로 공포감만 높아지면서 졸지에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남성들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한 사회적 의식 때문에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을 떠안게 되는 일은 없어야한다.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낸 피해자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성범죄를 수면 위로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온당치 못한 시선들과 오해로 그들이 겪어야할 ‘사후적’ 고통을 고려해볼 때 피해자들에 대한 성숙한 배려와 의식이 더욱 절실하다. ‘도가니 사건’ 등을 비롯한 요즘의 사회적 이슈들이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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