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 형식은 무엇이었을까? 거의 의문의 여지없이 그것은 영화일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영화를 ‘발명’한 뒤, 이 환상적인 이미지의 세계는 한 세기 동안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는 놀라운 환각, 집단적이고 수평적인 관람 경험, 역사적 기록, 정치적 선동 수단, 남루한 일상의 관찰, 인류의 영원한 꿈의 표현, 미래에 대한 회의 등을 가능케 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영화가 그 위력을 발휘할까 하는 질문에는 아마도 쉽게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새로운 세기는 더 파편적인 이미지 조각들, 예를 들어 스마트폰, 게임, 유투브(youtube) 등에 의해 주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영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 예술 형식이야말로 이미지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선배인 회화와 사진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 그것들과 뚜렷이 구분된다. 왜냐하면 바로 영화는 운동과 시간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대중성과 예술성에 전례 없는 범위를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영화 앞에서, 대중들은 운동의 직접성에 열광했고,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시간의 다양성에 빠져들었다.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비일상적인운동을 경험하고 또한 비습관적인 시간을 체험한다.

이런 배경에서 들뢰즈의 사유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1983년과 85년에 두 권의 <시네마>라는 책을 썼다. 이 저작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한 철학자가 영화에 온전히 자신의 저작을 바친 첫 번째 사례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드문 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와 함께 영화를 보는 일은 우리 시대의 문화의 최전선에서 이미지와 개념, 예술과 철학이 어떻게 만나고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지 탐색하는 일이 된다. 앞으로 일곱 차례에 걸쳐, 들뢰즈가 언급하는 중요한 영화의 장면들을 다루면서 동시에 그의 영화철학의 얼개를 스케치하고자 한다.

 

 

베르토프, 영화의 눈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의 많은 유형들을 분류하는데, 그 중 맨 앞에 지각-이미지를 위치시킨다. 지각-이미지는 영화의 영점(零)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 지각"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영화만의 고유한 지각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영화감독은 베르토프(Vertov)이다. 그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을 통해 "영화-눈"(Kino-eye)이라고 명명한 자신의 영화 이론을 형상화한다. 영화는 카메라라는 기계적 장치를 통해 속도와 위치의 측면에서 인간의 자연적 지각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지각의 세계는 달리는 마차와 기차, 하늘 높이 솟은 공장 굴뚝 끝 등 세계의 모든 지점에 놓인다. 지각의 범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의 눈은 몽타주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영화적 편집이야말로 관객을 이야기의 모든 전통으로부터 단절시키며 지각의 자유도를 무한히 확장한다. "키노-아이는 몽타주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한 모든 기법을 사용한다. 임의의 시간 순서로 우주의 모든 장소를 연결하고 비교하며, 필요할 경우 영화를 만드는 모든 법칙과 관습들을 깨면서 몽타주한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지각은 이제 모든 지점에서 포착된 무한히 잘게 부서지는 이미지의 파편들로 전환된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그것을 기체적 또는 "분자적" 이미지라 부를 수 있다. 필름 한 조각에 담긴 이미지들, 즉 포토그램(photogramme)이 영화-이미지를 생산하는 발생적 요소이다. 영화의 문법이 확립되어가던 1920년대에 이처럼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든" 채로 영화의 발생적 조건에 대해 탐구했다.

 

 

 

* 필자 소개

이찬웅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 =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와 철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프랑스 리옹 뤼미에르 대학에서 영화학 석사, 리옹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연세대, 서울시립대에서 들뢰즈의 사유를 중심으로 프랑스 현대철학과 영화철학을 가르쳐 왔으며, 현재 이화인문과학원 인문한국(HK)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와 엔조 파치의 <어느 현상학자의 일기>가 있고, 들뢰즈와 프랑스 현대철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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