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입생 때 머리를 길게 길렀다. ‘이화여대, 그리고 여대생’ 이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힘든 과제를 받고, 옷도 ‘여대생답게’ 입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를 다시 자르고, 내가 좋아하는 ‘여대생답지 않은’ 옷을 자주 입고 다닌다. 물론 저것이 순식간에 내린 결정은 아니다.

나는 왜 ‘여대생’ 으로 보이기 위해 저러고 다닌 걸까? 나는 왜 나로서의 나가 아니라 내가 여대생인 것을 항상 생각해야 했던 것일까?

나에게는 저런 ‘정의내림’이 너무도 무겁고 억압적인 일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강요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이화여대 다녀요’ 라고 말했을 때 내가 받는 시선이나 나에게 지워지는 고정관념들이 싫었다. 또 나는 이상하게도 그 시선에 맞추려 노력하고 있기도 하였다. 문화 '정체성'이란 것은 과거의 나에게 엄청난 짐이 되었으며(나는 여대생이므로 그래야 한다), 나에게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준거 집단으로 작용하였다.

문화 정체성이란 것은 이토록 과거의 나처럼 내가 아닌 나로서 정의되는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폭력과 억압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교류하며, 즐거울 수 있는 나라는 사람의 틀이 되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 보면, 결코 문화 정체성이란 것은 두렵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선택한 정체성에 대해서는 나는 결코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내가 억지로 속해진 집단에게는 다르다.

나는 대한민국 88만원 세대여서 대학에서 공부보다 취업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든지, 이런 것은 여전히 나에게 스트레스고 폭력으로 느껴진다. 나는 항상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으나, 그것이 만일 자신의 선택의 문제로 온전히 남을 수 있다면 나는 나에 대해 어떤 정의가 내려지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즐거워 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하는 것’ 또, 정의된다고 해서 ‘닫히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이것이 문화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정현(심리·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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