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에는 얼마나 많은 비(非) 이성애자가 있을까?
이화여대에는 얼마나 많은 비(非) 이성애자가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이마에 자신이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만 구천 이화인을 대상으로 성정체성 전수조사를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상당히 많다. 생각보다 훨씬, 그것도 ‘레즈비언’이라는 이름 밖에서.
이화에는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양성애자),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정짓지 않고 열어두는 성소수자의 비율이 타 대학 공간에서보다 월등히 높다. 성소수자 이슈와 전혀 관련 없는 교내 동아리들에서 CC(캠퍼스 커플)를 종종 찾을 수 있으며, ‘이성애자로 살아왔는데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화이언 게시판 글에는 동감의 댓글들이 달린다. 필자가 비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더 많이 눈에 뜨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이는 학우들도 많을 것이다.
이는 대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공간과 20대 여성이라는 구성원 자체가 다른 연령, 다른 계층, 다른 성별 집단에 비해 갖는 특성 때문일 수도 있고, 특히 이화에는 자기성찰과 다양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성정체성 개념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하는 여성학이라는 학문이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이 복닥거리는 곳에는 어디든 사랑이 싹틀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감정이 함부로 부정되고 재단되지 않는 환경이라면 편견을 넘어 그 감정이 충분히 자랄 수 있다는 점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화에서의 연애는 그나마 파라다이스였다”고 말하는 어느 졸업한 커플의 사례를 들어보자. 동아리 생활을 같이 하며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튼 두 선배가 있었다. 하지만 이화의 문을 나가고 직장생활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인 영역에서까지 '규범'에 꼭 맞추어 살아가기를 요구받게 된다. 직장 동료들에게 연애 상태를 반드시 숨겨야 함은 물론 오래된 연인을 두고도 상사가 주선하는 소개팅을 억지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이성애 결혼에 대한 부모님의 압력,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을 ‘미완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들, 미래에 대한 불안함 등은 둘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과연 둘만의 관계로 이 모든 압박들을 버틸 수 있을지, 환경이 바뀌면 관계가 똑같을 수 없는 것은 여느 이성애 커플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우리에게는 더욱 가혹하다고 선배는 씁쓸하게 웃는다.
이처럼 이성애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외의 가능성을 생각조차 않는 우리 사회의 ‘정상성의 규범’ 안에서, 남자친구 없는 여자, 여성스럽지 못한 여자,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 등은 모두 ‘요주의 인물’이 된다. 남성과의 연애 → 결혼을 전제로 이리저리 맞추어 보는 여러 ‘조건들’ → 그리고 결혼 제도로의 골인.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러한 연애와 결혼 각본 밖에 밀려난 관계들은 보이지 않은 채 허공에 부유한다.
해서 졸업 한 이화인들 중 많은 수가 결국 자신의 동성애적 경험들을 희석하거나 증발시키게 된다. 여자와 사귀었던 경험, 단 한 두 번이라도 여자에게 설렘이나 떨림을 느끼며 정체성에 대해 조금의 의문이라도 품었던 경험 등은 모두 잊히거나 ‘한때의 경험’, 혹은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무마된다. 그리고 많은 수가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이성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한 개인의 책임감 부족이나 배짱 없음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 ‘만들어지는 정상성’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분명 있던 경험을 너무나 쉽게 잊어야 할 것 혹은 지나가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정상성, 분명히 존재하는 이들을 없는 존재로 은폐해버리는 정상성이란 것이 결국 무엇일까. ‘당연’하고 ‘보편적’이라는 그 정상성이라는 이름 뒤에는 삭제되고 솎아져야만 했던 기억들의 덩어리가 있지 않을까.
지난 26일 있었던 졸업식에서 1724명의 졸업생이 높이 던져 올린 학사모에 앞으로 그들의 삶에 가득할 행복과 행운을 기원하며, 사회초년생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가혹하게 정상성의 틀을 요구할 사회에서 자신의 모든 경험과 감정을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