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의 모자와 디지털‘스토리텔링’
8개의 모자와 디지털‘스토리텔링’
  • 한혜원 교수(디지털미디어학부)
  • 승인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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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칼럼

카이스트(KAIST)에서‘사과(apology)’에 대해 연구하는 김호(더랩에이치 대표)는‘현대인은 살면서 최소한 8개의 모자를 만들어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인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려면 나와 남들이 인정하는 정체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단 뜻이다.

그런데 이 8개의 모자를 만드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모자, 학생으로서의 모자, 동아리 회원으로서의 모자를 다 합해도 아직 3개. 트리플 전공을 하고, 각종 인턴십을 이수하고 공모전에서 입상해도 여전히 8개를 채우기가 힘들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한 개인에게 다양한 역량을 갖추라고 촉구한다.

8개의 모자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일까. 최근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인문학, 공학,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 가능한 유연한 모자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지식의 통합, 학계와 현장의 연계 등 21세기적 요구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창설한 MIT 미디어랩(Media Lab), 조지아 공과 대학의 이매진 랩(IMAGINE LAB), 1993년 조지 루카스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개소한 USC의 ETC(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 게임과 가상세계를 토대로 엔터테인먼트 기술을 개발하는 카네기 멜론 대학의 ETC(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만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문학, 커뮤니케이션, 공학 그리고 디자인’등 기존의 전공명을 병렬로 나열하는 형태를 선호하는 반면, 한국의 경우에는‘문화기술, 디지털 스토리텔링’등 신개념을 창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전자의 경우 기존 분야의 정체성을 최소한 유지하는 가운데 통합을 모색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가치 창출에 주력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2000년대 초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출현한 당시에만 해도 화두는‘디지털’이었다. 디지털 유목민, 디지털 익사이팅 등 20세기말을 지배하던 가치들은 하나같이 디지털이라는 접두어를 달고 새로운 세기로 그 생명력을 연장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1년, 인류는‘마치-와 같은(comme si) 왕국’인 가상세계(virtual world)에서 아바타(avatar)를 만들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거울세계(mirror world)에서 나아가, 현실에 상상을 더한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하 AR)을 만들며 살아간다.

웬만한 신기술의 출현에는 쉬이 감탄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환되는 중이기에, 디지털은 더 이상 변별적이고 매력적인 접두어로서 작용하지 못한다.

보이는 기술은 순간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스토리텔링은 영원하다. 이제 인류는 순간적인 볼거리가 아닌, 천 년을 두고두고 살아갈 패러다임을 찾는 중이다. 따라서 디지털보다는, 스토리텔링에 방점을 두는게 맞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이야기를 주고받는다’를 의미하는 스토리텔링만큼 변함없는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허구적인 이야기를 창작하고 이를 소비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은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없어질 것이 아닌, 원천적인 욕망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신화적 상상력과 미래지향적 기술의 융합을 통해 이뤄진다. 2011년, 이제 우리는‘디지털’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디지털‘스토리텔링’을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자의 가짓수를 늘리기 전에 반드시 본질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제한된 시간, 경쟁적으로 모자 개수 늘리기에만 급급하다보면 정작‘나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무엇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원천적 질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과 면담을 할 때‘8개의 모자 중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모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꼭 던진다. 의외로 8개 중 하나의 모자를 콕 찝어서 답하는 학생은 드물다.‘일단 다 해봐야 알겠어요.’라는 대답이 가장 많다.

사실‘스토리텔러’란 직업은 드물거나 아예 없다. 그러나‘디지털 스토리텔링의 마인드를 가진 디자이너’,‘스토리텔링을 이해하는 공학자’,‘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광고 기획자’라는 직업은 성립 가능하다.

여러 가지 정체성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자를 위해, 나머지 7개의 모자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는 것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