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요즘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뉴스에서 자주 마주치는‘우월하다’라는 말을 볼 때마다 불편해진다. 누군가를 치켜세우기 위해 우스갯소리로 쓰이는 말이라고 할지언정 우월한 유전자, 우월한 성적표, 우월한 각선미 등등 참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 단어는 명백히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월’은 누군가의‘열등’을 전제로 하기에 기사를 읽는 순간, 외재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사람은‘열등감’을 선사 받는다. 그러한 기준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최근‘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연일 뜨거운 감자다. 아이돌로 점철된 가요시장에 권태를 느낄 즈음, 재야의 실력파 음악가들을 재발견한다는 기획이 우선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경연을 통해 등수를 매기는 규칙은 시작 전부터 많은 우려를 낳았다. 최초 기획자인 김영희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좋은 음악‘만’으로는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즉, 서바이벌 형식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핵심적 전략이기도 했다.

그런데 몇 번의 경연이 진행되고 나자 가수들의 편곡이 정형화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폭발력 있는 공연이 상대적으로 득표를 많이 받는 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반면 이에 부합하지 않는 단아한 음색이나 창법을 가진 가수들은 하위권에 머물며 자괴감에 빠지거나 자신의 음악인생 전체에 회의를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가수의 꼴등은 그 주의 가장 완성도 낮은 공연을 나타내는 지표는 분명 아닐 것이다.

감상만이 있을 뿐 절대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음악은 듣는 이의 인생사와 감정 안에서 고유의 울림을 가지는 것일진대, 이를 줄 세운다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 점점 의문스러워졌다.

우리는‘줄 세우기’문화에 알게 모르게 익숙하다. 우리들 모두 청소년기에는 입시전쟁을 겪었고 이제는 험난한 취업의 문턱 앞에 서있다. 학창시절 1등을 선두로 하여 일렬종대로 줄 세워진 성적표를 받았을 때, 그 성적표가 필자로 하여금 40명 중에 몇 번째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시절 우등생에서 지금은 대기업 입사로, 우리는 하나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으며 또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각자의 외모가 가진 개성적 아름다움은 없애버리고 자로 잰 듯 황금 비율만을 선망하는 성형열풍 또한 우리 사회의 획일화된 지향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떤 사회에서 구성원 모두가 단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을 때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우월함’이나‘나는 가수다’의‘1등’혹은‘컴퓨터 미인’이라는 이름표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얻고자 한다면 그 집단에서 최상위의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조금씩 열등감과 불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 최상위의 사람마저도 불안함에 전전긍긍하다 결국 우울증에 걸려버리고 말 것이다. 즉 개인의 고유한 가치가 통일된 기준에 따라 재단될 때 사회는 풍요로움과 행복을 잃고 만다.

필자는 가장 성숙한 사회를 다원화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구성원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자신만의 목표를 지향하도록 배려하고 존중해주며, 이러한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물론 익숙하지 않고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 홍세화 또한‘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그가 단지 나에게 다르다고 말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이미 미워하고 있었다”고 고백한 적 있다.

일전에 오스카 와일드라는 영국의 극작가가“일관성은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이다”라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의 말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모두 하나의 목표만을 부르짖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한국 사회와 우리 마음의 빈곤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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