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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매니페스토가 사라졌다. 매니페스토는 이행 가능성, 예산 확보의 근거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공약, 즉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말한다.

뜨거운 감자인‘반값등록금’. 여야  모두 경쟁적으로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겠다며 유권자들에 호소하지만 실현 가능한 공약, 즉 매니페스토인가에 대해선 의문이다.

등록금 인하에 대한 정치권 논의는 2006년 지방선거 직전,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현 교과부 장관)이 등록금 부담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교육비 부담 절반 줄이기 정책 발표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이 정치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반값등록금’정책이다.

국가장학제도의 도입, 졸업생 기부활성화, 기여입학제로 재원을 마련해 등록금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를 통해 등록금 8조원 중 정부가 절반인 4조원을 부담해 등록금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한나라당은‘반값등록금’이란 용어를 사용해 표심잡기에 나섰다.

이에 대해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정봉주 의원은“조세부담을 늘리는 반값등록금 정책은 국민을 현혹하는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김진표 열린우리당 정책의위장도 당정회의에서“정치적인 선전은 될 수 있지만 실천적인 대책은 될 수 없다”며 반값등록금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여·야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2009년 4월 이주호 당시 교과부 차관은“왜 반값등록금 공약을 지키지 않느냐”는 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질의에“등록금을 반으로 줄이자는 게 아니라 등록금 부담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말이었다”고 답했다. 한편 민주당도 여당일 때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며 반대하던‘반값등록금’정책을 들고 나와 자신들이 원조(元朝)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2009년 등록금 인하 투쟁을 거론하며“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할 때‘표(票)풀리즘’이라고 비난한 게 한나라당”이라고 말했다.  

여야는 지난 6년간 반값등록금 정책을 유권자들의 표심 잡기 수단으로 활용하며 입장 바꾸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정략으로 얼룩진 반값등록금 공(空)약으로 피멍이 드는 건, 매년 1천만원의 등록금을 내는 300만 대학생들과 서민들이었다.

 등록금으로 매년 수많은 대학생이 자살하는가 하면 20대 꽃다운 여대생의 긴 머리가 잘려나가야 했다. 아직 사회에서 제대로 걸음마도 못 뗀 대학생이 학자금으로 쓰기 위해 대출받은 돈을 제때 상환하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한국장학재단에 따르면 2006년만 해도 670명에 불과했던 대학생 신용불량자는 2007년에는 3천785명, 2008년 1만250명, 지난해 2만5366명으로 급증했다. 4년 만에 38배나 늘어난 것이다.

가계 소득수준에 비해 높은 등록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등록금 고공행진이 이어졌지만 부실한 대학교육은 여전했다. 지난해 세계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54위였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별 대학 등록금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2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경제포럼(WEF)가 매긴 교육의 질은 139개국 중 57위에 그쳤다. 그야말로‘반값교육’의 실태를 보여준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대학생들이 날로 늘어가는 이 시점에‘반값등록금’공약으로 정치 놀음을 하는 이들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까. 누군가에겐 생존이기도 한 문제가 정치판에선 얼룩진 표심경쟁으로 비화되는 것이 이 나라의 정상적인 행보인가.

등 돌린 20대와 그들의 부모 세대인 4~50대의 표심을 잡겠다고 급하게 좌회전을 시도하는 여당, 등록금 복지 정책으로 인한 여당의 분열을 공격하며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으려는 야당. 모두가 진정성 있는 공(公)약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두 거대 정당의 총성 없는 전쟁에 심신이 지쳐가고 있는 것은 죄 없는 국민들이다.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반값등록금 정책’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대학생, 자녀의 대학 공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그들에게 더 이상 말 뿐인 희망으로만 자리해선 안 된다. 우린 공약을 실현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엔 관심없다. 그저‘반값등록금 정책’이 빈껍데기 공(空)약으로 그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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