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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월) 2011년 피겨 세계선수권 대회가 끝났다. 벤쿠버 올림픽 챔피언, 피겨 신, 아름답다는 수식어로도 모자란 김연아 선수가 출전해‘지젤’과‘오마쥬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로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그는“결과에 얽매이기보다는 좋은 연기로 호평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실수는 했지만 그래도 잘 이겨냈다고 생각한다”고 당차게 말했다.

 

필자는 김연아 선수의 그런 한마디에 행복을 얻는다. 어떤 상황에서도‘나는 행복한 스케이터입니다’라며 웃는 모습에 필자도 행복한 승냥이임을 느낀다. 일상이 지칠 때, 행복해지고 싶을 때는 곧잘 김연아 선수의 동영상을 클릭하며 (진부하고 묵은 표현이지만)‘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을 그를 통해 깨닫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람들은‘행복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면 그를 얻는 방법도 터득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자신의 이름을 달고‘아무개의 행복론’을 앞다투어 내놓는다.‘내가 이렇게 해서 행복해졌으니 자, 이제 너도 한번 이렇게 해봐. 그럼 행복해질거야.’그들이 제시하는 행복론을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보다는, 그로인해 정말 행복해지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 든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행복이란‘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거나 또는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좋은 감정으로 심리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누군가에 의해 정의내려진 행복일 뿐이다.

‘그럼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묻지 말자. 당신은 소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게서 이미 그 답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지금의 기분이나 상태가 좀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가 곧 행복이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희망에 대하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내일부터 행복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다. 순간이 이어져 영원이 된다.’

필자는 등교 시 사당역이 종점인 777번 버스를 타면서 행복을 느낀다. 사당역에서 어차피 내려야 하므로 사람들이 치여 낑겨가며 내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숫자는 아니지만 흔히들 말하는 행운의 숫자가 3번이나 들어간 것도 그렇다.

오늘 아침 화장이 잘 됐을 때, 네 생각이 나 문자 한다는 친구의 안부 문자, 스타벅스 프라프치노의 반값 할인 등 거창하지는 않아도 이들에게서 행복 한 조각씩을 얻는다.

필자의 지인도 하루 일과를 마친 뒤 깨끗이 씻고, 가지런히 정리된 이불 속에 들어가 코만 빼꼼히 내밀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 5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그는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프랑스 출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은 그의 저서 「예술의 숲」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무들이 씩씩하게 가지를 뻗어 하늘에 뚜렷한 윤곽을 그리고 있는 오솔길은 마법의 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뭔지 신기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깊숙한 그 수풀 속에는 행복이 숨어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주변 가까이에-지금만큼은.’ 

얼마 전에는 새내기로 추측되는 학생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야, 나 아무래도 여대 잘못 온 것 같아. 인생이 재미없어!”

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총 천연색의 꽃들, 봄바람 부는 오후의 학생문화관 숲, 나무가 우거진 포도길 벤치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해질녘 북아현문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에 홀로 서있노라면 밀려드는 그 행복감을, 멀리서 행복을 찾는 그네들은 아마 느끼지 못할 것이다.

칸트는 행복의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어떤 일을 하는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갖는 것.

필자는 오늘도 김연아 선수의 동영상을 켠다. 당신도 마우스클릭 하나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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