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밖 거리에서 예술 작품과 어우러지다
미술관 밖 거리에서 예술 작품과 어우러지다
  • 최은진 기자
  • 승인 2011.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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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위를 걸어보고, 위에 앉아보고… 작품과 하나되는 미술 산책

중간고사를 마치고 문화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다. 하지만 전시 관람을 위해 필요한 돈 만원은 이들에게 적잖은 부담이다. 갑갑한 전시장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 인도, 길가의 벤치 등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온 예술작품들을 찾아 산책을 나서보자. 왕복 버스비 2천원이면 미술관 밖 거리에서도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대역 버스정류장에서 721번 버스를 타고 10여분 거리에 있는 광화문 역에서 내리면 도로의 오른쪽, 흥국생명 건물 앞에 서있는 키 22m의 커다란 거인이 행객을 맞이한다. 제목이‘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인 이 작품은 미국의 초현실주의 조각가 조나단 브롭스키(Jonathan Borofsky)가 2002년 만든 작품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 등에 망치질하는 사람이 설치된 것에 이어 서울에 7번째로 세워졌다.

흥국생명 본사 앞에 위치한 '망치질하는 사람'

위 아래로 쉼 없이 움직이는 이 조각의 오른쪽 팔은 한번 왕복할 때마다 약1분17초가 걸린다. 망치를 천천히 내리치는 모습이 그 위용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거인이 하루에 약 500번 하는 망치질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이 일상을 반복해야하는 현대인들의 고독함을 상징한다. 거인이 꾸준히 망치질 하는 모습은 인간 노동의 신성함을 보여주며 시간을 초월한 노동의 보편성을 뜻하기도 한다.

망치질하는 사람을 지나 LG광화문 빌딩 쪽으로 열 걸음 정도 걷다보면 길 건너 서울 역사박물관 앞에 여러 개의 파이프로 만들어진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스틸파이프로 구성된 여러 개의 막대들이 담을 형성하듯 곡선 형태로 세워져 버스정류장을 에워싸고 있다.

이 작품은‘아트쉘터(Art shelter)다. 작가 최욱이 2007년 만든 이 작품은 자취를 감춰버린 옛 경희궁의 담을 현대적으로 복원했다. 세워진 파이프들은 길 한 가운데에서 경관 사이의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어줌으로써 담의 모습을 드러낸다.

건축회사 ONE O ONE Architect 최욱 대표는“아트쉘터의 한쪽 벽과 지붕은 사라져 버린 경희궁을 상징한다”며“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시간들과 장소들을 현대적인 느낌으로 작품에 재현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역사박물관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과거의 흔적을 경험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다”며“과거의 공간 위에 현대적 공간을 중첩시킨 아트쉘터는  다른 시간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서울 역사박물관 앞을 지나 길가의 쭉 뻗은 가로수들의 녹음을 만끽하며 5분 정도 직진하다보면 정동사거리가 나온다. 정동사거리 강북삼성병원 앞에 위치한‘보이지 않는 문’은 나무로 만들어진 축대와 나무계단으로 구성된 조형물이다. 조형물이 행인들이 병원 앞의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내리도록 도와준다.

강북삼성병원 앞에 위치한 '보이지 않는 문'

밤에는 외벽에 설치된 파란 불빛이 켜져 조형물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안규철 교수(미술원 소속)에 의해 세워진‘보이지 않는 문’은 그 장소가 단순한 길의 일부가 아니라 서대문(돈의문)이 있던 터였음을 암시한다. 조형물에 씌어진‘1422~1915’는 서대문의 생몰 년도를 알려주고 있다.

서대문은 4대문 중 하나로서 1422년 세종대왕 때 세워졌다. 이후 서대문은 1915년 3월 일본이 서울 시내 도로를 넓히기 위해 붕괴됐다. 헐린 서대문은 목재와 기와로 나뉘어져 일반인에게 경매로 팔렸다. 안 교수는“원형을 재현하는 것보다 사라진 서대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기억의 공간을 조성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며“관람자가 보이지 않는 서대문을 머릿속에서 재구상하게 유도함으로써 일제 치하 조국의 비애를 상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문의 계단을 걸어본 뒤에는 맞은 편의 덕수궁 길로 들어가보자. 주 캐나다 대사관 앞의 520년 된 높이 17m, 둘레길이 5.16m의 커다란 회화나무가 행인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준다. 나무 그늘을 지나 10분 정도 걷다보면 정동극장이 나온다. 정동극장 앞에는 철제로 된 라디오 주파수 모양의 벤치가 있다. 한국 라디오 방송의 역사를 기념하는‘라디오 정동’이다.

현 덕수초등학교의 자리에 위치했던 경성 방송국은 1926년 세워져 그 이듬해인 1927년 2월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개시했다. 2007년 정동극장 앞에 라디오 정동이 만들어진 당시 벤치에 앉으면 벤치 내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정동의 공개방송과 흘러간 유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스틸 벤치만이 남았다. 라디오가 사라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벤치 사이로 우뚝 솟은 나무들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라디오 정동’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더 걷다보면 화강석, 벚나무 등의 소재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의자들이 보인다. 바둑알, 윷가락 모양에 곡선의 미를 자랑하는 이 벤치들은 홍익대 최병훈 교수(목조형가구학과)가 만든‘예술의 길, 사색의 자리’다.

산책길에 놓인 벤치들은 행인들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덕수궁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이곳에서 잠시 앉아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눈다. 최 교수는“산책길의 벤치는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관람자들과 일종의 정서적 교류를 시도한다”고 말했다.

산책 도중 만나는 작품 위에 앉아보기도하고, 그 위를 걸어보기도 하면서 관람자는 작품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작품과 물아일체 되는 산책을 끝내고 난 뒤 덕수궁 돌담길의 운치를 감상하며 그 여운을 즐기다보면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시청역에 도착한다. 

따스한 봄날 만개한 꽃과 함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거양득을 누리고 싶다면 강의를 일찍 마친 어느날 오후 광화문 역으로 가자.

최은진 기자 perfectoe1@ewhai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