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포스코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한 학생이 서명을 부탁해왔다.“이화여대 미화, 경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에 동참해주세요.”기꺼이 동참했지만 부끄럽게도 필자는 그 때까지 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파업의 정황을 상세히 알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 수업시간이 거의 다가왔던 터라서 허겁지겁 서명을 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었다.

며칠 후 같은 장소에서 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거대한 휴지통을 이끌고 걸어오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복잡한 인파속에서 미화원 아주머니는 건물 로비 안의 그 누구보다 가장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몇 일전의 기억과 함께 의식이 선명해졌다. 마시고 있던 음료수의 달콤함으로부터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이 밀려왔다.

지난 해 10월부터 청소 경비노동자들과 이화여대 학교 측은 임금인상과 근로환경 개선 관련 사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날로 치솟는 물가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계도 유지하기 힘든 최저시급 수준의 임금을 받았으며, 잠시 숨 돌릴 휴게실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려왔던 것이다.

‘이니셔티브 이화’라는 근사한 슬로건과 민주주의라는 사회 전체의 소명을 위한‘소통’을 주창하며 날로 번듯해지는 겉모습과 대비되는 이와 같이 치졸한 현실은 이화 안에서 부조리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자들이 전면파업에 돌입하고 나서야 지난 25일, 학교 측과의 합의가 성사되며 사건은 일단락 됐다.

일본 대지진과 리비아 공습 등 세계적인 이슈에 떠밀려 잊혔지만 지난 1월엔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도 있었다. 고(故) 최고은 작가가 아사(餓死)했다는 믿기 힘든 보도는 사실여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탄식하게 만들었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영화 산업의 눈부신 성취 그 이면에‘꿈’을 빌미삼아 젊은이들을 착취하는 현실과 임금 체납이 부지기수인‘영화판’사정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지만, 영화 제작의 핵심에 관여하는 시나리오 작가가 어떻게 제도적인 보호 없이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대우를 받아왔는지 아직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처럼 풍요속의 빈곤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단면들은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불합리한 관행과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사회의 약자들은 그들의‘복지’가 아닌 정당한‘권리’조차도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일면에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반면 안전망 바깥의 소외된 곳에서는 사활을 걸고 호소해야만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회학 기능론자들의 주장이 지나치게 미화됐다는 생각이 든다.‘사회의 구성요소들은 중요도에 따라 보상을 받으며 기능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걱정되는 것은 필자 또한 그랬듯 무뎌지거나 무관심해 지는 것이다. 얼마 전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에게“공부를 해야 하니 조용히 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던 홍익대 학생회장의 발언은 우리에게도 논의의 여지를 남긴다.

물론 타인의 생존권보다 자신의 학습권을 앞세우게 될 만큼 차갑고 무심해 진 건 우리 탓이 아닐지 모른다.‘88만원세대’라는 터널을 관통하기 위해 취업난의 벼랑 끝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찾기보다‘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을 읽으며 위로를 갈구하는 것도 우리가 원했던 일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은 아니라도, 좀 더 인간다워질 순 없을까. 버나드 쇼는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죄를 무관심이라 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의 기획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가 규정한 그의 죄목 또한‘무관심한 죄’였다. 타인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지성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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