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발생 당일인 11일 오후 2시, 3D 모델을 제조하는 설비가 있는 나고야대학을 찾았다.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뚜껑이 없는 플라스틱 컵에 담겨 나왔다. 잠깐 테이블 위에 두고 연구보고서를 쓰는데 예의 그 느낌이 왔다.

나는 지진에 예민한 편이다. 작년 12월 일본에 도착해서 이십 여 차례가 넘는 지진을 몸으로 느꼈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하는 나라고, 주변의 일본인들은 웬만한 지진으로는 좀체 동요하지 않아서 서서히 일상 속 지진을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

그러나 11일의 지진은 최근 3개월간 느낀 지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뚜껑이 없는 컵이라서 커피가 쏟아졌다. 이어 유리창이 흔들리고 건물 골조가 덜걱거렸다.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카페테리아의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교육받아온 대로 테이블 밑에 숨으려고 했다.

그 순간 전자정보관 쪽에서 사람들이 제 1 공학관 쪽으로 우르르 걸어 나와 대피했다. 필자도 짐을 챙겨 건물을 빠져나가 그 무리에 합류했다. S통신사를 이용하는 몇몇 사람은 휴대폰이 잠시 동안 전파수신불가상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불안한 음성으로 떠들어 댔다.“에? 왜 갑자기 지진?”“기분 나빠. 인터넷 돼?”“아니, 내 휴대폰 먹통이야.”“진도 몇이야?”“도호쿠(동북지방)에 지진난 거라는데?”

도호쿠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불과 이틀 전 홋카이도에서 유빙을 조사하고 내려오느라 동북지방을 통과해야 했던 사람으로서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로 아오모리, 하치노헤, 아키타, 센다이 등을 지나왔다. 게다가 12일에도 동북지방을 방문할 예정으로 발권까지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11일 16시를 기해 동경으로 향하는 신칸센은 운행이 중지됐다. 대합실 TV에선 연신 지진관련 보도가 방송됐다. 공중전화기는 쉴 틈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멍하게 화면을 지켜봤다. 어떤 사람들은 길게 늘어선 줄 속에서 누군가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잘 지내냐’는 말은 평소에는 참 값없는 말이지만 이럴 때 큰 위력을 발휘하고, 곧 따뜻한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동경에 돌아갈 수 없어서 나고야 역 근처 모든 비지니스 호텔을 알아봤다. 정장 입고 브리프케이스 든 직장인들과 어깨를 많이 부딪히게 됐다. 거의 모든 호텔이 만실이었다. 아까 저 호텔에서 마주친 직장인을 다른 호텔에서 또 만나고 또 만났다. 결국 JR을 타고 가나야마까지 갔으나 가나야마에 있는 호텔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다.

12일은 다행이 신칸센 운행이 재개되어 동경의 집으로 귀가했다. 낮 1시, 동경 시내 전철이 띄엄띄엄 운행되고 있었다. 야마노테센은 만원이었다. JR 시나가와역의 몇몇 플랫폼은 출입금지 띠가 둘러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벽에서 못이 빠져있고, 냉장고 문은 열려져 있고, 컵과 접시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 곳에서 낮잠이라도 잤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 가스는 자동차단기가 작동해 멈춰있었다.

동경대 지도교수이신 이쿠타 코지(Koji Ikuta, 生田幸士)교수님의 지시로 귀국을 서두르게 됐다. 필자는 학교에서 구입해 준 1년 오픈티켓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발권이 수월했다. 항공사에 전화부터 걸어 15일 출발 좌석을 확보했다.

30일자 19시 55분 비행기가 15일 19시 55분 비행기로, 이어 12시 20분 비행기로, 이어 9시 45분 비행기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문자와 전화가 빗발쳤다. 방송에서 난리라며, 괜찮으냐고 묻는 그들에게‘다친 데도 아픈 데도 없다’고 안심을 시키는 한편으로 걱정이 됐다. 12일부터 15일까지의 3일은 시간의 각을 1분 간격으로 헤아리며 불안하게 보냈다.

계속되는 여진으로 9층 아파트는 심하게 흔들렸다. 잔잔한 진동과 격렬한 진동이 계속되면서 배 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한국 언론 보도는 자극적이었다. 표제며 사진이며 영상들이 사람의 가장 밑바닥 정서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무선인터넷으로 CNN과 Yahoo Japan의 속보를 보고 들으며 1년을 예상하고 가져온 짐들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동경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따금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지나갔다. 그 대비가 홀로 있음의 공포를 심화시켰다. 가끔 장난으로라도‘집에 불이 나면 뭘 갖고 나가야 할지’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상황이 왔다. 화장실에 가다가 현관에 가지런히 벗어둔 부츠가 (여진 탓에)모로 쓰러져 있는 걸 보고 현재가 비상상황임을, 이곳이 일본임을 실감했다.

정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랜턴을 먼저 챙겼다. 물도 챙겼다. 지진 발생 시 엘리베이터가 멈추기 때문에 비상계단으로 대피해야 한다. 이런 것 외에도 우선순위가 잡히지 않은 많은 것들을 순서 없이 모두 챙기려다보니 몸과 마음이 피곤해졌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지진을 맞아 짐을 챙기는 일은 등산만큼이나 고되었다.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초반에는 횡으로 흔들리다가 심해지면 종으로 흔들리고 마지막엔 동심원의 형태로 흔들렸다. 고층일수록 진폭이 심했다.

14일 자정을 기해 동경 시내 계획 정전이 실시됐다. 14일 오전 6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은 이미 인산인해, 몇 시간이라도 빨리 가려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14일 내에 한국에 돌아갈 가능성은 낮았다. 하네다 공항은 개방형 콘센트가 없었기 때문에 수유실에 들어가 랩탑과 폰 배터리를 충전했다.

어떤 외국인은 공중전화기의 전원을 뽑고 그 콘센트에 본인의 폰 배터리를 충전하기도 했다.

며칠간 긴장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수유실 의자에 기대어 10분쯤 잤을까. 갑자기 리큐르 병을 아래위로 흔들어 칵테일을 잘 섞듯이 지구가 하네다 공항을 흔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접는 커튼과 의자가 흔들렸다. 수유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공항에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 긴장했다. 이어 경보가 울리며 25분씩 이륙이 지연됐다.

공항에 여진이 시작되자 더 많은 외국인들이 몇 시간이라도 빨리 귀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재난상황에도 의연하게 자기 직장에 나와 일을 하거나 휴가를 맞아 호놀룰루나 파리 등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보도되고 있는‘일본 침몰’,‘대재앙’등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귀국비행기티켓은 128만원까지 가격이 뛰었다. 공항에서 같이 밤을 샌 대학선배는 지인의 도움으로 128만 원 이상의 항공권을 쉽게 구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몇 시간이라도 더 빨리 한국에 가기 위해 대기자 라인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왔다 갔다 했다. 결국 그녀는 15일 오전 8시 50분 비행기로 한국에 무사히 돌아갔다.

만 30시간 정도를 공항에서 보냈다. 공항 내의 많은 점포들은 계획정전에 의해 임시휴업하거나 개점시간을 늦췄다. 물류의 이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편의점에서는 대부분의 음식물이 동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통틀어 테스코를 비롯한 여러 마트에서도 사재기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약자를 보살피며 질서정연하게 삶을 살았다.

14일 하루 종일 대기자로 기다렸지만 여석이 없었다. 당분간 집에 돌아가지 않을 작정으로 짐을 챙겨 나왔기 때문에 공항에서 잘 준비를 했다. 집에 돌아간다 해도 15일 아침에 공항까지 제 시간에 못 올 것 같았다. 전철을 비롯해서 교통수단이 반 마비상태였다.

밖엔 비가 내렸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방사능 물질이 함유된 비라면서 몇몇 사람들은 문도 열지 못하게 했다. 차가운 공항바닥에 누워 천장을 봤다. 공항 천장을 천체 관측하듯 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공항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열기로 가득했다.

 때때로 여진이 발생해 경보가 울렸다. 몸은 물먹은 하마처럼 척척한데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잠이 들 수 있는 만큼의 힘도 긴장에 빼앗긴 기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기류가 불안정해서 기체가 많이 흔들렸다. 기체의 흔들림은 지진과 별 연관이 없는데 재난을 겪어서인지 승객들은 크게 동요했다. 아이들은 울었다. 기내식을 나눠 주던 스튜어디스들은 모두 커튼 뒤로 돌아갔다. 필자도 어느새 안전벨트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남자직원이 기체 중앙으로 나와서 직접 설명을 했다. 고도를 낮췄으며 불안정한 기류를 타서 동체가 흔들렸다고. 이제 괜찮을 거라고.

한국에 도착해 김포공항 타일을 밟자 안도감보다도 쓸쓸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햇빛이 너무 밝았다. 쿵작거리는 호객행위도, 거리에서 들리는 유행가도 그대로였다.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바로‘그 불’속에서 빠져나온 것도 아닌데“우리 강아지 힘들었지?”하는 엄마의 걱정도 낯설었다.

 타인의 재난을 재료로‘나는 나은 편이지’하고 위로받기도 싫었다. <한국은 안전지대>, <방사능은 편서풍 타고 태평양으로> 등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타인과 본인의 도저한 거리를 실감했다. 결국 남의 일인 것이다.

동해라는 담을 두고 이번 재난은 분명 타인의 일일 테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소멸을 본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회복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무명에 떨어진 생수가 증발하듯이 조용히 깨끗이 치유되었으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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