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전국 장애인 동계체육대회 알파인스키부문에서 금메달 목에 건 양재림씨

강원도 정선군 하이원 리조트 스키장 출발선, 긴장이 역력한 표정의 한 선수가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5.4.3.2.1!”경기진행요원이 카운트 다운을 외치자 양재림(동양화·09)씨가 슬로프를 향해 힘차게 점프했다. 양씨는 깃발 두 개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이드러너(시각장애인 스키선수 앞에서 손짓이나 소리로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인 국민대 정고운(체육학·11)씨를 따라 내려갔다. 그가 깃발을 돌자 정씨가 소리쳤다.“업(up)!”양씨는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폈다. 마지막 코스에 다다르자 정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양씨는 거의 엎드리다시피한 자세를 만들어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첫 대회여서 굉장히 떨렸고, 그래서 그냥‘넘어지지만 말고 내려오자’고 생각했어요.”

양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2월15일~18일 치러진 제8회 전국 장애인 동계체육대회 알파인스키부문에서 여성시각장애인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개강 이후에도 일주일에 4일 이상 맹훈련하며 알파인스키 정상의 자리를 노리는 그를 1일(화) 신촌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각 장애는 스키를 배우는데‘장애’가 아닌‘계기’였다

우리나라에 여자 시각장애인 알파인스키 선수는 양씨뿐이다. 이번 전국 체전도 양씨 혼자였다. 여자 경쟁자는 없었지만 남자 시각장애인 스키선수들을 통틀어도 가장 기록이 좋았다.

 “경쟁자가 있어야 더 자극이 되고 잘 탈 수 있는데 여자 시각장애인 알파인스키 선수는 저 혼자라 아쉬웠어요. 그래서 이번엔 마음속으로 남자 시각장애인 알파인스키 선수를 라이벌로 정해놓고‘이 사람들보다 잘 타자’라고 생각하면서 라이벌의식을 키웠어요.”

그가 어려서부터 앓아온 시각 장애는 스키를 배우는 데 있어‘장애’가 아니라‘계기’가 됐다.

“균형 감각을 기르기 위해 6살 때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했어요. 취미로만 탔던 스키로 선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죠.”

양씨는 미숙아 망막증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눈으로만 세상을 봐야했다. 1.2kg의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직후 인큐베이터로 옮겨져 산소를 투여 받았다. 공급된 산소는 미숙아 망막증을 유발해 그의 시력을 앗아갔다. 거리감이 없어 계단도 잘 못 걷는 등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았다. 이를 걱정한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취미로 스키를 시작한 그는 사촌 동생들과 매년 스키장을 다니며 스키를 즐겼다.“동생들과 누가 더 빨리 내려오는지 시합하면서 스키를 즐길 수 있었어요. 17년 동안 취미로만 스키를 탔는데 더 잘 타고 싶어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내가 내일 사고가 나서 눈이 안보이게 된다거나 죽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스키를 계속 하고 싶어”

양씨는 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작년 1월초부터 선수가 되기까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양씨의 아버지는 양씨의 시력 등을 문제로 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오른쪽 눈으로만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지만 작년 한 해 스키를 탄 뒤 시력이 더 떨어졌다.

병원에서는 망막세포가 노화중이라는 진단만 내렸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양씨의 전공도 스키와는 전혀 다른 분야인 미술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스키 타면서 밝은 것을 자주 보고 자외선도 많이 쬐서 그렇다’며‘그림 그리는 것을 어릴 적부터 좋아했으니 그냥 미술을 계속해라’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돌린 데에는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엄마는 항상 어떤 식으로 아빠를 설득해야 되는지 힌트를 주셨어요.‘막 무턱대고 싸우면 안 된다. 네가 하고 싶다는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줘라.’라면서요.”

양씨는 그래서 매일 헬스를 다녔다. 몸살 감기에 걸려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말려도 아픔을 참고 빠짐없이 운동을 하러 나갔다. 그림도 일부러 스키와 눈에 관한 것들만 그렸다. 양씨의 이러한 노력에 아버지는 그가 선수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선수가 되기 위한 테스트를 통과하고 난 뒤 어머니는 양씨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 이제 정말 선수해야 돼. 최악의 경우 완전 실명이 될 수도 있고, 스키 타면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잖아. 안하면 안되겠니?”

그는 대답했다.“내가 내일 사고가 나서 눈이 안보이게 된다거나 죽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스키를 계속 하고 싶어. 이 정도로 타고 싶어 엄마. 사실 나도 왜 이렇게 스키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어떤 사람들은 스피드가 좋아서 탄다고 말하지만 난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 그냥 타는 것 자체가 좋아.”

“왜인지 모르는 게 진짜 좋은 거야. 그럼 해.”마지막 허락이었다.

화선지 대신 슬로프 위에 그림을 그려 나가다

그는 1월2일 현 코치인 정인섭 감독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1월 초부터 선수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선수로서 치른 첫 경기는 제8회 전국 장애인 동계체육대회였다. 양씨는 대회를 준비하며 1월 초부터 약 한달 반 동안 현대성우리조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일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을 연습에 투자하며 하루에 6~9시간 스키를 탔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스키를 타지 않는 날에도 헬스장은 매일 나갔다.

그가 스키를 타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1월 중순 태극기가 달린 국가대표 스키복을 받았을 때였다.“사실 그 때는 정식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감도 들었어요. 동시에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했죠.”

노력 끝에 양씨는 2월16일~17일 알파인스키의 슈퍼대회전, 대회전에 출전해 1등을 거머쥐었다. 남자 시각장애인 스키선수들을 통틀어도 대회전 1분6초, 슈퍼대회전 39초로 가장 기록이 좋았다.

“생각보다 기록이 좋아 놀랐어요. 아버지께서 많이 반대하셨는데 처음으로 스키 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 기뻤어요.”

힘든 상황에서 스키에 대한 열망 하나로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시작한 양씨. 그는 2014년 소치 동계 패럴림픽(Paralympic, 장애인 올림픽대회)을 목표로 계속 뛰고 있다.“우리나라 남자 지체장애인 선수가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패럴림픽 알파인스키 부문에서 은메달을 한 번 땄으니 2014년 열리는 소치 동계 패럴림픽에서는 제가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양씨는‘원하는 것을 붓으로 종이 위에 표현하는 동양화처럼 스키도 슬로프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얀 슬로프가 종이고 스키가 붓이라면 스키도 그림과 똑같아요. 스키는 숏턴(short turn), 미들턴(middle turn), 롱턴(long turn)을 하면서 슬로프를 내려오잖아요. 그림처럼 제가 원하는 방향과 크기로 선을 그으면서 내려오는 거죠.”

양재림씨는 19일(토)~21일(월) 열리는 전 일본 장애인스키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오늘도 화선지대신 하얀 눈밭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가 흘린 땀방울이 멋진 그림으로 완성되길 기대해본다.

정서은 기자 west_silver@ewhain.net
사진제공:  양재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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