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15일 발행된 교수 회고록「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를 통해 본 다섯 퇴임 교수들의 봉직생활, 그리고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이화사랑 이야기


<편집자주> 다섯 명의 명예교수가 참여한「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가 작년 12월15일 발행됐다. 이 책에는 명예교수 5명의 40년에 달하는 본교 봉직생활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다. 본지는「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에 담긴 다섯 교수들의 봉직생활 이야기를 좇아본다.

김영일 명예교수(영어영문학과), 김영호 명예교수(독어독문학과), 김재은 명예교수(심리학과), 서광선 명예교수(기독교학과), 안광식 명예교수(언론학과)는 30여 년 전부터 본교에서 교분을 쌓아왔다. 양띠 동갑내기인 그들은 팔순을 맞아 이화 회고록을 집필했다. 안 교수는“함께 정년퇴임 한 후 정기적으로 만나온 우리는 뜻있는 일을 하고자 회고록을 쓰게 됐다”며“지난 50년간 이화는 우리에게 사랑을 줬고, 우리는 이화에 사랑을 바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라는 책 제목은 이렇게 탄생했다.

△젊은 남자 교수들, 인기로 말썽 많던 시절

다섯 교수가 이화에서 남자교수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즐겁기도,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한 일이었다.
김영일 교수와 안광식 교수는 당시 남자교수였기 때문에 겪었던 에피소드를「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곳곳에 풀어냈다.

이화의 젊은 남자교수는 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교내 인기 스타였다.

김 교수의 인기는 수강신청 학생의 옷을 찢어놓을 만큼 대단했다. 1960년대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직접 발품을 팔아 수강신청을 하러 다녔다. 선착순으로 진행되는 수강신청 대기자 줄은 교수들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내 반에 등록코자 하는 학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줄을 길게 서고 서로 먼저 등록하려고 북새를 치는 바람에 옷이 다 찢길 정도로 민망한 일도 일어났다. (중략) 내가 젊은 남자 교수였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기는 하다.

안 교수는 젊은 교수시절을 회상하며“매년 수학여행에서 30~40명의 학생들이 제일 젊은 교수였던 나에게 춤을 추자고 해 즐거움 가운데 어려움도 느꼈다”고 말했다.

젊은 남자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때로 이유없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안 교수에게 여대에서의 생활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젊은 교수와 여학생들과의 교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총장, 교수, 학생들 모두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토로했다.

딸기골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도 퇴근하던 김옥길 총장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으며, 부임 초기에 수강생 수가 비교적 적은 대학원 강의를 이해창 학과장이 내게는 아예 맡기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임용되었던 터라 오해를 받는 일도 있었다. 김 교수는 도서관 뒤편 산길을 산책하다 산을 감독하던 사람에게 잡혀 서무실까지 끌려갔다. 직원은 그를 연세대 남학생쯤으로 생각해 여대 안에서 산책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것이다.

△팔복동산, 서문… 다섯 교수의 추억 속 이화동산을 돌아보다 

다섯 교수 모두 본교 안에서 반세기를 보낸 만큼 그들에게 있어 이화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다.

YWCA 고문으로 활동했던 김영일 교수는 김애다기도실(본관3층), 팔복동산 등 학내 곳곳의 기도처를 추억의 장소로 떠올렸다. 그는 이곳에서 YWCA 활동의 일환으로 학생들과 기도 모임을 진행했다.
김 교수는“동아리가 많이 활성화되지 않은 당시에 YWCA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큰 활동무대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팔복동산 등의 기도처는‘작은 아침 기도 모임’과‘아침 경건회’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장소다.

팔복동산은 지금 도서관 뒤에 있는 산등성인데 그곳에 가면 모여서 예배 볼 수 있는 아담한 곳이 있다. 아침 고요한 때,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에서 갖는 경건회는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안 교수는 기억에 남는 장소로 본교의 서문을 꼽았다. 그는 이화유치원 옆 학교 사택에 1973년부터 거주했다. 집 주변에 위치한 서문을 통해 그는 70년대 학생 데모가 한창이던 시기를 떠올렸다. 각 대학의 데모대가 학교 정문에서 얼마나 멀게 나갔느냐가 화제가 되던 시기였다. 서문은 본교생 데모대가 경찰이 깔린 정문과 후문을 피해 학내외를 오가던 비밀통로였다.

유치원과 정구장 옆을 통해서 우리 집 쪽으로 나오는 곳에 조그만 서문이 하나 있었다. 정문과 후문 쪽은 경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데모대가 못 나가고 때로는 서문 쪽을 통해서 나가기를 시도했다.

△고(故) 김옥길 선생, 첫 제자 등 이화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

이들은 이화 교정 안에서 만났던 제자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안 교수는 재직 당시 제자들과 보냈던 나날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학생들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모든 제자들을‘나의 애인들’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이화에서의 첫 번째 제자들이 바로 그 5회 졸업생들인데 나는 그들을 나의‘첫사랑의 제자들’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물론 모든 이화의 제자들을‘나의 애인들’이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안 교수는“제자들과의 추억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라며“제자들이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이자 훌륭한 여성 지도자로서 제몫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고(故) 김옥길 선생은 팔순 양띠 교수들의 기억에 큰 스승으로 남아있었다. 1961년~1979년 본교 총장직을 맡았던 고 김옥길 선생은「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김영일 교수, 김영호 교수는 고 김옥길 선생을‘큰 스승’,‘자상하고 다정한 분’으로 추억한다. 김영일 교수는“김옥길 선생님은 교수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운 분이었으며, 지금도 늘 추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안 교수가 취임 당시 느꼈던 고 김옥길 선생의 인상이다.

내가 처음 뵌 김옥길 총장은 사람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면서도 강하게 이끌고 가는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는 분같이 보였으며 가족적 분위기의 신뢰가 가는 큰 어른이라는 점을 느끼게 했다.  


반세기 동안 이화와 함께했던 다섯 교수들은 가슴 넘치는 사랑을 이화에 줬다. 그들이 풀어낸 이야기 속에는 이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있다.「팔순 양띠 교수들, 이화사랑 반세기」속에 오롯이 담긴 교수들의 추억이 여전히 빛나는 이유다.

한주희 기자 hjh230@ewhain.net
사진제공: 안광식 교수, 김영일 교수,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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