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는 역사적으로 18, 19세기 서유럽을 풍미했던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개인의 권리와 평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탄생한 근대의 자유주의는 이후 자유로운 인간들의 이성과 혁신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되는 계몽주의로 이어졌다. 그 결과 18세기 이후 서유럽은 홉스봄의‘이중 혁명’즉,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축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수라는 말은 근대 유럽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속에서 나타났다.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영국의 정치철학자인 버크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 혁명을 관찰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던 버크는 혁명과정에서 나타난 급진적인 변화가 혁명세력들이 주창한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음을 지적한다. 급격한 변화 보다는 현재를 기반으로 한 점진적인 변화가 보다 타당한 선택임을 제시하며 보수주의의 개념적 의미를 확립하였다.

한편, 현재 진보주의로 번역되는 liberalism은 자본주의의 성장 가운데에서 등장한 소위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 속에서 나타났다. 정치권력에 의한 개입 없이 시장이 스스로의 자유로운 작동 속에서 최적의 균형을 찾게 된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이후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면서 사적 영역에 대한 공적 권력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의미하게 되었다.

역사적 연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진보는 애초에 보수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버크에 의해 “현재에 기반한 점진적 변화”로 제시된 보수주의는 급진주의와 대척점에 위치하며, 지금 진보주의와 상관없이 등장하였다. 진보와 보수는 공히 근대의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적인 개념들로 탄생됐으나, 이후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전자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이고 급진적인(상대적인 의미에서) 개혁을 옹호하고, 후자는 현 체제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관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진보와 보수는 미국으로 넘어가며 의미가 한층 더 변모했고 양자의 대립이 보다 분명해진다. 특히, 두 관점은 시장에서 정부의 역할,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가치갈등이슈들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진보는 시장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변화의 주체로서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편, 사회/문화적으로 제기되는 낙태와 동성애 등 가치갈등이슈들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 봐 정부에 의한 개입과 통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수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유사하게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부정적으로 보아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를 옹호하고 작은 정부를 주창하지만, 가치갈등이슈들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족주의와 인간에 대한 근본 가치를 해친다는 이유로 정부의 적극적인 통제를 주문한다.


결국 진보와 보수는 의미가 고정된 것 이라기보다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개념들로 파악해야 한다. 쟁점이슈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차이가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틀을 기준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의 ‘진보’ 혹은 ‘보수’는 그 속에 다양한 시각들을 공히 갖고 있으며, 때문에 양자 간의 대립이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을 양산한다고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더욱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어느 하나의 관점에 대한 옹호를 다른 관점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서 서로를 배제하는 태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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