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경(조소·08)씨

26일(금) 오후4시 ECC 지상1층 계단 옆에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학생들 한가운데에서 김나경(조소·08)씨가 ‘그림 그려줌’이라고 쓰인 입간판을 세우고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김씨는 가위로 종이를 오려내 만든 빈 공간에 금색 락카를 뿌려 선을 만드는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김씨의 가위가 하얀 도화지 위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자 텅 비어있던 종이 위에 앞머리가 생기고 눈과 코가 만들어졌다.

이날 김씨의 손님 중에는 외국인도 있었다. 방콕에서 온 잭릿 차로앤촙(Jakkrit Charoenchob)씨와 대만에서 온 에바 리우(Eva Liou)씨는 관광차 본교에 들렀다가 초상화를 제작 중인 김씨를 발견하고 초상화를 부탁하게 됐다. 잭릿씨는 “이화여대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방문했는데 이렇게 멋진 그림까지 받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번 학기 ‘Soft Sculpture’수업 시간 작업을 계기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교수님과 토론하며 미술작업을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만이 만들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김씨는“초상화는 그리는 대상과 교감이 가능하고 즉각적인 피드백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10월16일(토), 11월10일(수) 청계천에서, 19일(금), 26일(금) ECC에서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하루 평균 10명,  총 40명 이상의 얼굴이 김씨의 손을 거쳐 갔다.

처음 청계천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는 순찰하던 경찰이 김씨를 제재하기도 했다. 노점상 단속지역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3시간 넘게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과 얘기하며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아 또 다시 스케치북을 들고 나왔다.

그리는 횟수를 더해가면서 작업 방법도 바뀌었다. 청계천에서 작업할 때는 드로잉(drawing,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표현)으로 그렸지만 학교에서 그릴 때는 가위로 종이를 오리는 방식을 썼다. 손님에게 준 초상화를 다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드로잉을 할 때엔 작업물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며 “작업 방법을 바꾼 후부터는 같은 그림을 다시 찍어낼 수 있어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대가로 손님들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한 개씩 받고 있다. 초상화를 그리고자 거리에 나선 초창기에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화폭에 담겼던 사람들이 조금씩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조그만 물건이라도 기억의 매개체를 만들고 싶었다.

“이 카지노 칩은 청계천에서 초상화를 그려 드린 아저씨가 주신 거예요. 도박할 때 쓰던 거라며 주셨는데 특이한 물건이라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죠. 이 캥거루 열쇠고리는 호주에 유학 갔다 온 고등학생한테 받았어요. 이 고양이 브로치는…”

초상화를 그려 주고 받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기억을 되짚는 김씨의 표정에는 애정이 담뿍 묻어나왔다.

김씨는 앞으로도 초상화 그리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동안 그린 초상화를 기록해둘 홈페이지도 만들 계획이다.

“제가 추구하는 가치는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는 장을 만드는 거예요. 초상화는 소통의 물리적인 증거품이죠. 그분들이 제가 드린 초상화를 볼 때마다 저를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그림으로 마음을 나누는 일,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문호은 기자 he@ewhain.net
사진: 안은나 기자 insatiable@ewhain.net
배유수 기자 baeyoosu@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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