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말하지 않는 사회
죽음을 말하지 않는 사회
  • 이지윤(동양화·09)
  • 승인 20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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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살이(웰빙)’ 열풍이 분 지 꽤 되었다. 많은 식당이나 식료품점에서‘웰빙’이라는 앞머리를 단 식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웰빙’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유행 트렌드가 아닌, 건강과 장수를 위한 더 합리적이고 나은 생활 패턴을 지칭하는 하나의 확고한 개념어로 자리 잡은 듯하다. 과학·의료 기술의 발전과 경제생활수준의 향상으로 건강에 대해 높아진 관심이 경제 불황에도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무병장수와 불사(不死)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온 세상을 구석구석 뒤졌다는 진시황의 이야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대를 보아도 온갖 기능식품과 보양식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불로장수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 의료기술과 생명공학의 놀라운 발전은 ‘죽음’ 그리고 ‘불로장생’에 대한 태도를 적지 않게 바꾸어 놓았다. 의료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줄기 세포 배양이나 생명체 복제가 가능해지며 불로장생의 꿈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는 듯 보이자 사람들은 종교의 자리에 대신 과학을 끌어 올렸다. 마치 중세의 사람들이 신이나 민간신앙에 의지해 이 숙명적인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듯이 사람들은 빛나는 과학 기술에 소원을 빈다.

숭배되는 과학이 이전의 종교와 다른 것이 있다면 과학에선 아직 ‘극복되지 못한 한계’에 대해 말할 뿐 온갖 인간적인 상상력과 함께 어우러지는 ‘죽음의 자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해 가는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다. ‘더러운’것으로 간주되는 시체를 서둘러 영안실이라는 방에 봉치시키듯 사람들은 ‘늙고 쇠약함’을 병적인 것으로 여기고 서둘러 치우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담론을 신 대신 보험제도에게 맡긴다. 

과거엔 며칠을 두고 지속되며 삶과 죽음의 끈적끈적한 경계에서 행해지던 죽음의 의례가 삶 가운데 순환하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했다면 최대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간소화되고 절약된 현대판 장례식에선 삶과 죽음은 상존할 수 없는 동떨어진 것이 되었다. 사회는 죽음에서 더욱 떨어져 온갖 매스컴과 광고를 통해 사람들에게 더욱 더 젊음에 머무를 것을 요구하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자취를 감추고 젊음과 장수가 당연시되는 이 사회에서는 오히려 자살이 범람한다. 죽음이 가려진 사회에서 개인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반동 작용은 아닐는지.

마하트마 간디는 “매일 밤 잠 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라고 말한다. 삶은 죽음을 피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마침표에 의해 온전해진다. 삶에서 쫓겨나 죽음을 대상화하는 것은 생명현상을 반쪽만 이해하는 것이다.

진정한 참살이, 즉 진정한 건강함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을 좀 더 오래 유지하면서 죽음과 노화로부터 조금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자신의 삶의 주기를 온전히 이해할 때 가능하다. 괴테는 ‘죽어서 태어나라. 이것을 모른다면, 그대는 어두운 지상에서 한낱 흐릿한 손님일 뿐’이라고 말했다. 죽음 그 자체는 비극이 아니며 이를 내면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죽음을‘흐릿한 손님’이 아닌 주체적인 삶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살 옹호론이라든지 죽음 예찬론이 아니다. 죽음과 노화를 우리 삶의 당연한 여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이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존중하며 현재에 더 충실하게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죽음을 피하고자 죽음의 전령을 잡아두었던 시지프스는 그 벌로 저승세계에서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그래서 시지프스의 바위는 ‘숙명적인 형벌’을 뜻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를 삶 속에서 담담히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숙명적인 형벌’이 아니지만 죽음을 가둬 둘 때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은 죽음의 무게에 눌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죽을 존재고 또 죽음이 필요한 존재다. 우리가 삶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삶과 죽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 동양신화에서 죽음을 관장하기도 하는 여신인 서왕모가 동시에 생명의 복숭아를 관리하는 여신이기도 한 것은 이를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