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눈 녹여 세수하던 1940년대부터 20초 안에 전화를 받기 위해 복도를 전력질주했던 1990년대까지…시대별로 돌아보는 기숙사 생활

 

총동창회의 소식지인『이화 동창』제120호가 10월25일 발행됐다.『이화 동창』은 본교에 대한 동창들의 회상을 담은 ‘그 때의 이화교정’을 연재한다. 이번 가을 120호의 주제는 ‘기숙사’다. 당시 기숙사는 지금의 진선미관이었다. 이화·포스코관(포관) 자리에도 기숙사 신관(빌링슬리 홀)이 있었다.
본지는『이화 동창』과『이화 기숙사 110년 이야기』(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8)에 담긴 동문들의 목소리를 통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숙사 풍경을 시대별로 살펴본다.

 

△전력난·물 부족으로 궁핍했던 1940년대
1945년 해방 직후 기숙사는 전력난, 부족한 쌀 배급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5월 후 기숙사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시간은 오후7시~9시 묵학시간(조용히 자습하는 시간) 뿐이었다. 북한이 송전을 중지해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은선(약학·49년졸)씨가『이화 동창』에 투고한「어머니의 엄명“기숙사를 떠나면 안된다”」에는 당시의 기숙사 상황이 잘 드러나있다.
 
해방직후라 기숙사에서도 전력난으로 촛불을 준비 할 때도 있었고, 겨울에는 찬물로 소세도하며 쌀 배급 부족으로 유아식이 아닌 성인 우유죽으로 조반을 대치하는 일은 비일비재였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위로는 사감선생님이 계시고 동창들 간에는 서로 우정으로 의지하며 생활해가는 대학생활의 황홀함….

불안정한 전기 공급으로 학생들은 공부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시험 기간이면 기숙사생들은 남포등(석유를 넣은 그릇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리로 만든 등피를 끼운 등) 아래에서 공부하곤 했다. 성정순(체육학과·49년졸)씨는 그의 경험기「양보하고 인내하던‘공동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열 시에는 꼭 소등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험 때는 창문을 검은색 치마로 가리고 촛불을 켜든가 이불 속에서 손전지를 켜고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그 당시 느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기숙사 건물의 수도 시설도 열악했다. 기숙사생들은 1936~1974년 학부생 기숙사로 사용됐던 진선미관 앞에 있는 우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약300명의 기숙사생들은 아침마다 정문 철도 근처에 있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했다. 기숙사 내에 공중목욕탕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사감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학교 밖 공중목욕탕에 나가 목욕을 했다. 이윤진(체육학부·49년졸)씨는「엄동설한에 눈으로 세수하던 그 곳」에서 당시의 어려움을 밝힌다.

수도 사정도 여의치 못해 물이 고인 웅덩이로 내려가 세수와 세탁을 해야 했으므로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 가끔은 두 손으로 눈을 떠서 세수하기도 했으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모두가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볏짚으로 만든 이불, 삶은 깍두기…1950~1960년대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했던 본교는 1953년 8월31일 서울로 환도했다. 전쟁으로 인해 진선미관의 유리창은 모두 깨져있었고 집기도 모두 사라졌다. 기숙사생들은 침대도, 이불도 없는 기숙사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볏짚을 이용해 직접 이불을 만들어야 했다. 다음은 유동월(약학·55년졸)씨의「그리운 나의 천국 시절」중 일부다.

어느 늦은 가을, 기숙사 마당에 트럭으로 햇짚(볏짚)이 가득 실려왔다. 김봉순선생님은 전 사생에게 침요 크기만한 깃광목(표백 안 된 누런 천) 한 개 씩을 주면서“실과 바늘로 나루를 만들어 볏짚을 속에 넣어 각자 자기 침요를 재간껏 만들라.”고 하셨다. (중략) 그 덕분에 우리 300명 사생은 찬 마룻바닥이 아닌 따뜻한 바닥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전후 가난했던 시절의 방학은 사생들에게 ‘기약 없는 이별’이기도 했다.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간 사생들이 집안 사정 등으로 인해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면회실은 희비의 연출장」에서 고(故) 백명희(교육·59년졸)씨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6.25 전쟁 직후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곧 대학 캠퍼스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주곡과 같아서 고향 가는 짐보따리를 싸면서 마음 한구석에 기숙사 친구들과의 이별을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개학 후 기숙사로 돌아오면 한방 식구 네 명 중에 하나, 둘, 심하면 세 명까지도 캠퍼스에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기숙사 식당에서는 ‘삶은 깍두기’를 식탁에 내놓기도 했다. 1950~1960년대 여름철이면 유행하던 콜레라(콜레라균에 의해 구토와 설사에 따른 탈수 증상, 근육 경련 등을 일으키는 소화 계통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조경희(건강교육·73년졸)씨는「‘삶은 깍두기’식 사생 사랑」을 통해 당시를 회고한다.

사생들 입에서“제발 씹을 때 소리나는 김치 좀 주세요”가 큰 외침이었으니…. 도대체 이 삶은 깍두기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에 대해 드디어 항의를 하였고 얼마 안 가 곧 우리는 본래의 깍두기를 먹게 되었으며, 삶은 깍두기는 사생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생 사랑(?)의 내막인즉, 그 당시 여름철이면 늘 긴장하게 만들던 콜레라 발생 소식 때문이었다.

 

 

△잔디밭 산책, 점호를 위한 전력질주 등 캠퍼스의 낭만…1970~1980년대
1970~1980년대 기숙사생들은 대학생활 중 캠퍼스 안에서 누렸던 낭만을 추억했다. 다음은『이화 동창』중 신은주(정외·81년졸)씨의 회고록「3백여 작은 아씨들의 환상적 공간」의 부분이다.

어느 날엔가 후문 옆 버들잔디에서 뒹굴어 보던 일도 생각난다. 그러다가 방과 후 댄스강의실에 몰래 들어가 따라 하기도 하고, 그때 그 속에서 꿈꾼 미래를 착실히 살아가는 친구와 선후배들, 지금도 우린 가족처럼 안부를 나누고 살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기숙사 점호 시간이었던 오후10시에 맞춰 돌아오기 위해 정문에서부터 현재의 포관 위치에 있었던 기숙사까지 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최진영(보건교육·92년졸)씨는「기숙사의 밤 그 낭만의 밤」에서 그 시절을 ‘초치기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기숙사생의 밤은 뛰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겠지만 밤 9시55분이면 우리들은 기숙사를 향해 어김없이 전력을 다해서 질주를 했다. 고등학교 체력장 때도 나오지 않았던 신기록을 매일 경신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아 이대 전철역에서 기숙사까지 몇 분 만에 왔는지가 점호 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인터넷 없던 시절, 전화에 얽힌 추억…1990년대
1990년대 사생들의 통신 수단은 전화였다. 1980년 기숙사 사무실 1대의 전화기로 시작해 방마다 내선 전화가 깔리기까지 13년이 걸렸다. 김소희(보건교육·97년졸)씨는 그의 회고록「한밤중에 벌였던 떡볶이 파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1학년 때까지만 해도 600명이나 되는 사생이 단 여섯 개의 전화번호, 그리고 층마다 주어진 여섯 대의 전화기를 이용해야만 했다. 여섯 대의 전화기는 세면장 앞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 방이었던 352호까지의 거리는 약 100미터, 방으로“김소희 5번 전화 받으세요”란 방송이 나온 순간부터 전화는 20초 안팎으로 대기된다. 그 전화가 끊기기 전에 재빨리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기숙사생들에게 전화 걸던 수많은 외부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전화를 받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달려간 줄은 몰랐을 거다.

각 방에 내선 전화가 설치된 후에는 전화를 이용해 타대 학생들과‘방팅(각기 다른 방에 기거하는 남녀가 사교를 목적으로 행하는 모임)’을 하기도 했다.

2002년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국제교류처 최진이 직원은 “네 명이서 한 대의 전화기를 이용하다 보니 타대 남학생들로부터 방팅을 하자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며 “고향에서 부모님에게 전화가 오면 같은 방을 쓰는 친구가 대신 받아 전달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숙사생들은 기숙사 옥상에서 별똥별을 보는 낭만을 즐기기도 했다. 기숙사 옥상은 1998년 11월18일 새벽까지 개방됐다. 당시 옥상은 오후11시 폐쇄가 규정이었다. ‘새벽에 별똥별이 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사생회가 기숙사에 요청한 덕분이었다. 기숙사생들은 이날 삼삼오오 모여 담요를 두르고 옥상으로 나와 별똥별을 볼 수 있었다.

최씨는 “마침 그 날이 동생이 수능을 봤던 날이었다”며 “별똥별을 보며 동생이 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말했다.

1940~1990년대 기숙사생들의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했다. 기숙사생들은 점호 시간이 오후6시였던 1950년대에도, 오후10시였던 1990년대에도 점호 시간에 맞춰 기숙사로 돌아오기 위해 같은 언덕을 뛰어올랐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그들의 추억을 진선미관 앞의 우물이 꾸준히 지켜왔다. 11월의 오후, 진선미관 앞 우물 위에 이화의 세월을 간직한 낙엽들이 소복이 쌓여있다.             

 

이소현 기자 sohyunv@ewhain.net
사진제공: 이화역사관
자료제공: 총동창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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