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8일 경향신문 웹페이지에 기재된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싸이월드 광장에 올려졌다. 즉각적으로 댓글이 달렸다. “저 산이 왕년에 어마~어마~했거든~!” 그리고 이 한 토막의 글을 읽고 250명이 추천을 눌렀고 이 글은 한 순간에 ‘베플’로 승격하였다. 같은 시각, 트위터에서도 1분 간격으로 글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너도나도 백두산 폭발에 대해 한마디씩 툭툭 던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핫 이슈’가 없는 경우, 블로그와 트위터에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에 대해 건조하거나 과도하게 포장된 글을 올린다. 미니홈피와 블로그가 좀 더 세밀한 보고를 허용했다면, 트위터를 포함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들은 간결한 보고가 원칙이다. 전자든 후자든, 이제는 동네를 걷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웹사이트를 거닐면서 우리는 이러한 광경들을 흔히 접하게 된다.

이러한 사이버 공간의 글쓰기 문화는 전통적 글쓰기 문화를 대체하고 마는 것인가? 각종 미니 홈페이지와 개인 블로그의 유행으로 탄생을 알린 새로운 글쓰기 방식은 ‘토막 난’글을 통해 즉각적이고 대중적인 반응을 얻고자 하는 과시적 욕망에 기반을 둔 신문화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에 대한 통찰과 자기성찰을 글쓰기의 기본적 자세로 요구하던 기존의 글쓰기 문화를 심각하게 잠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신문화의 도도한 물결과 스러져가는 문화의 퇴조 사이에 표류하는 우리는 어떤 파도에 몸을 실어야하는 걸까?

글쓰기 공간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 장소들은 생각의 소통보다는 접속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킹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화제와 어법의 글을 쓰고, 글들은 조회 수만큼 등수가 매겨지고, 댓글도 공감 클릭 수만큼‘웃전’을 차지한다. 소통의 질이 아니라 양이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양을 채우기 위한 속도도 중요하다. 트위터에서 실시간으로 댓글에 댓글이 이어지는 모습은 마치 끝말잇기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한 줄로, 그것도 실시간으로 올리는 글에 과연 얼마만큼의 깊은 생각을 담을 수 있을까? 새로운 글쓰기 문화는 사색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속도와 물량의 글쓰기 문화는 어떻게 발생했으며 왜 계속해서 번성하는가?

강준만 교수가 그의 저서『‘간판 공화국’반세기』를 통해 한국문화의 병폐를 진단하면서 지적한 “크게 외쳐야만 귀를 기울여주는 소통 문화…집단주의 문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과시주의 문화”가 새로운 글쓰기 문화의 모태임은 분명하다. 그 순간의 대중적 관심사를 자극적 언어로 포장할 때, 신문화의 글은 ‘폭넓은’ 인정을 받는다. 또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어떠한 커뮤니티에 속하고 대세에 따르고 편을 가를 때, 신문화의 글쟁이는 사회에 “플러그-인”된 느낌을 갖는다.

결국 이 신문화는 글쓰기를 사유와 소통이 아니라 과시주의와 경쟁논리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무엇보다도 신문화의 글쓰기에는 생각을 다듬어내고 글을 빚어내기 위한 고통이 없다. 현실을 꿰뚫어보고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한 치열한 고뇌가 없다. 고통스런 글쓰기가 아니라 손쉬운 편집에 불과한‘사이버’공간의 글들은 종종‘사이비’글이 되고 만다. 

글을 쓰기 위해 “사물을 바로 보마”라고 김수영 시인은 다짐했다. 또한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무슨 글이든 탈고하려면…열댓 번을 뜯어 고친다”라고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말한다. 생각은 계속해서 생각의 웅덩이에 빠져드는 자에게 결국은 그 깊은 물맛을 내는 법이고, 글도 글의 의미와 전달을 집요하게 고민하는 자에게 깊은 울림의 글을 허락하는 법이다.

미니홈피와 트위터를 철폐하고 이미 네트워킹의 시대를 받아들인 사회로부터 고립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접속을 갈구하는 과시적 욕망의 대중문화에 휩쓸려 주체적 사유가 사라진 글쓰기를 계속하는 대신, 느리고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사유와 존재를 오롯이 담는 글쓰기의 근본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부디 자판을 지그시 누르는 손끝을 통해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과 주체로서의 목소리가 인터넷이라는 광속의 신세계에서도 그 깊은 울림을 잃지 않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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