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일은 잘 기억해 내는데 미래의 일은 도무지 모르는 인면수 성성이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막대기를 넣어 같이 다니는 관흉국 사람들은? 날개와 눈이 하나뿐이어서 두 마리가 함께 해야 날아갈 수 있는 만만이, 생김새는 돼지 같은데 몸은 누렇고 꼬리는 붉은 함유 등등. 이 주인공들은 동양 판타지의 고전인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들이다.

추석 특집으로 각 방송국이 편성하는 특선 프로그램에 꼭 빠지지 않는 판타지 영화. 많은 사람들에게 그만큼 판타지가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가 되겠다. 판타지가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생명력과 자유는 오랫동안 판타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매력 포인트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현실의 부족한 것들을 인식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상상과 꿈은 판타지를 면면이 이어오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부족함에 대한 인식으로 출발한 환상의 실재들은 어딘가 어색한 실재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지향점을 제시하며 자유를 맛보게 했고 사람들은 이에 다시 살아갈 자신의 일상에서 원기를 얻어 새로운 생명력을 이어 나갔다. 한 마디로 판타지는 사람들의 원형적 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타지를 인식하는 것은 바로 나의 문화 지도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일이다.

서울시는 지난 1월 여행정보 사이트 론리 플래닛이 발표한 세계 최악의 도시 3위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졌다. “여기 저리로 무질서하게 뻗은 도로들, 소비에트 스타일의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들, 심각한 오염, 영혼도 (뜨거운) 마음도 없다…”라는 것이 서울에 대한  평이었다. 곧 세계정상회의(G20)를 치러낼 것이고 한류 열풍의 중심지가 되는 서울의 최근 위상을 고려할 때 이에 걸맞지 않은 의아한 일이다.

타자의 시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분명 재고해야 할 태도이지만 타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를 다시 짚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우리의 모습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마음과 영혼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완벽한 현대적 도시 구현과 경제적 수치를 목표로 삼고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우리의 판타지는 아닌지. 우리의 도시는 이미 많이 현대화되고 화려해졌지만 잘 정비된 우리 도시에는 우리가 꿈꾸어 내려오던 우리의 동양적 판타지, 신화가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고 있는 곳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화와 꿈은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고 현재를 확장하는 여백의 공간이며 그로 인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가는 창고이다. 이는 우리의 도시와 삶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현재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문화적 정체성이며 마음과 영혼의 편린이라 말하면 지나칠까?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도시에서의 생명력의 원천은 일직선의 정연한 길이나 고층의 흐트러짐 없이 뻗어나가는 현대식 건물, 계획적으로 정비된 꽉 짜여진 완벽한 도시 구획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부러진 좁은 길, 두런두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듯한 늙수구레한 건물들, 공터에서 느껴지는 여백의 여유로움, 무언가 숨겨진 신화가 있을 법한 전통들에서 나온다. 최근 새로 복원된 광화문의 아름다움이 밤이면 아래에서 밝게 비추는 그 조명의 화려함과 깔끔한 벽 처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문 앞에서 무서운 표정이면서도 다소 해학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수문장 해치와 경복궁 건물 위 옹기종기 앉아있는 서유기의 동물들과 같은 동양 판타지가 그 광화문 너머에서 옛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한 편의 서사에서 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문화적 힘은 우리들이 꾸는 꿈에서 나온다. 미주대륙에 살았던 인디언 수우족 추장 블랙엘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세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우리는 충분히 우리의 판타지를 꿈꾸고 있는가? 우리가 뿌리를 둔 곳에서 이어 내려오는 그 꿈의 설레임을 들을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우리는 바로 스스로의 중심에 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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