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하고, 기사 거리 짜내고, 취재하고, 수업 듣고, 기사 쓰고를 반복하던 필자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미칠 것 같던 순간에 찾아온 추석 연휴. 학교, 학보사를 떠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시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이번 주에는 필자가 상록탑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기자라고 해서 모두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반례가 바로 필자다. 상록탑은 평소 자신을 숨기고 기사로만 독자들을 만나던 이대학보 기자들이 자신만의 견해를 과감 없이 드러내 독자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글재주 없는 필자가 상록탑을 쓰겠다고 했던 것은 처음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뜻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글이 좀체 풀리질 않았다. 동료 기자들, 주변 지인들을 붙잡고 대체 무엇을 쓸지 고민만 하다 시간을 흘려보낸 채로, 추석 연휴가 찾아왔다. ‘연휴에까지 일을 할 수야 없지. 모르겠다. 일단 쉬자!’
일을 하느라 그동안 참아야 했던 나의 오락거리에 빠져 들었다. 오락거리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멍 때리기(멍하니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신조어)’가 필자의 즐거움 아닌 즐거움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 방에서 대자로 뻗어서 가만히 천장을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 동안 지쳐있었던 나를 가만히 충전시키는 것이다. 그날 밖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며 받은 상처들을 털어내는 필자만의 의식이랄까. 하지만 평소에는 워낙 힘들고 지쳐 침대에 머리가 닿는 순간 잠들고 마는 일상이 반복됐다. 상처를 털어내지 못해서 늘 지쳐 있는 생활의 연속. 이번 연휴에는 잠시 나에게 그간 외면하고 지냈던‘멍 때리기’의 시간을 허락했다.

일상의 피로를 달래주는 혼자만의 위로는 역시 대단했다. 금방 에너지가 충전됐다. 기세를 몰아서 내게 2차 위로의 시간을 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드(일본 드라마)’ 밤 새워 보기.

드라마를 원체 좋아해서 평소에도 꾸준히는 봤다. 하지만‘일본 드라마’라고 하는 것 보다 ‘일드’라고 하는 편이 입에 착 감기는 것처럼 ‘일드’는 역시 밤새도록 봐줘야 제 맛 아니겠는가. 평소에는 여유 시간이 생기면 짬을 내 1회씩 쪼개가며 봤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도 일과에 쫓겨 자기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내 앞에 놓인 드라마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다. 잠 한 숨 못자고 해가 떠오르지만, ‘잉여 같다’는 생각 한 편으로 차오르는 뿌듯함은 이렇게 ‘일드’한 편을 정복해 본 사람은 알 터다.

취미, 혼자만의 놀이, 자신만의 오락거리…. 가만히 자기 안으로 귀를 기울이면 인생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의 일과에 지쳐 이 단순한 사실을 잊고는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나 다울 수 있는 때는 언제인지, 일상에 지친 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잊고 산다. 그 순간 인생은 힘들고, 팍팍한 것이 된다.

‘나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어떤 괴로움도 잊게 하고, 나를 다시 충전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무리 지쳐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말은 철 모르는 아이의 것처럼 순진하고 어리석어 보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만의 재밋거리, 자신만의 오락거리를 알고, 그 즐거움을 허락하는 자만이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감히 단언한다. 하루의 피로가 이중 삼중으로 짓누를 때에도 주말에 자신만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생각을 하면 갑자기 힘이 솟지 않던가.

그런데 뒤늦게 걱정된다. 위에 잔뜩 언급해 놓은 취미를 살펴보니 필자가 제대로 ‘잉여인간(쓸모없이 빈둥빈둥 놀고있는 인간을 가르키는 합성어)’으로 보인다. 그러나 타인에게 취미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없는 즐거움일지는 몰라도 필자에게 힘을 주는 오락거리임에는 분명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이토록 ‘잉여롭게’즐기고 나면, 밖에서 사람들과 부딪힐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인 것이다.

‘잉여인간’임을 커밍아웃한 필자도 있으니 모두들 거리낌 없이 자신만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길 이미 보름달에서 조금 찌그러진 달에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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