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2년 동안 파리에서 살거야. 아마 2~3년 동안 헤어져 살게 될 것 같아. 울지마. 아마 우리는 어딘가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예를 들면 아테네 같은 곳에서 재회해 다시 얼마 동안 만날 수 있어. 우리는 결코 완전히 남남이 되지는 못할거야. 둘 중에 어느 쪽인가가 상대를 찾을 때 상대방은 반드시 응할 테니까. 우리 두 사람의 관계 이상 가는 것도 찾지 못할거야. 그러니까 헤어져 있을 동안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서로 구속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만약 당신의 남자친구가 위와 같이 말하며 훌쩍 파리로 떠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자친구와 당장, 아니 결국에는 헤어질 것인가, 아니면 2~3년에 한 번씩 그와 재회해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위에서 인용된 말은 바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에게 한 말을 필자가 각색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보부아르는 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평생 사르트르와의 계약을 지키며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어떻게 평생 계약결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약속에 철저하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하나의 계획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어떤 순간을 가리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삼각관계 심지어 사각관계에 빠지면서도 서로를 속박하지 않으며 연인이자 동반자로 평생을 함께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사실 중요한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바로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크게 보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원리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정신적, 감정적 유대로 이뤄지는 공동체적 관계와 개인들 사이의 약속을 중시하는 계약적 관계가 그것이다. 흔히 감정적 유대에 입각한 개인들 사이의 협력은 가족이나 친구집단에서 나타나며, 계약에 입각한 인간관계는 상거래나 공식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사회는 예로부터 관습과 전통, 신뢰에 의거한 공동체적 관계를 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가치는 현대사회에 와서 점차 무너지고 있다.

계약적 관계는 공식적인 인간관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인간관계에도 스며들고 있으며 점차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통계청의 ‘2009 법률구조, 상담건수 및 개업 변호사 수’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서 개업 변호사 수와 인구 10만명 대비 변호사 수는 계속 증가했다. 특히 10년 전에 비해 이 수치들은 약2배가량 증가했다. 법률상담 건수도 2000년 이후 300만건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법률상담 건수와 변호사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 내의 갈등이 점차 합리적인 사회구성원 간의 계약에 의해 해결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적인 가치의 유입으로 합리성이 강조되는 풍조가 생겨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외환위기와 금융개방 이후 가속화된 세계화 때문일 수도 있다. 경제사정의 악화로 정감 있는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 때문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한국 사회는 점점 공동체적 관계에서 계약적 관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관계 속에 살고 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에 따르면 상호호혜적인 이익이 예상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며 서로의 이익을 증진 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워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계약적 관계와 공동체적 관계는 바로 그런 불확실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나온 대안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당신이 지금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관계는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관계인가? 철저하고 바람직한 약속을 통한 계약적 관계인가? 둘 다가 아니라면 당신은 상호 이익을 치밀하게 계산한 나머지 ‘진짜’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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