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지는 본교 창립 124주년을 맞아 교포와 교가의 변화상을 짚어봤다. 교포와 교가는 각각 시대에 따라 모양이 변하고 가사도 바뀌었다.

이화의 교가와 교표는 이화의 역사와 함께 수없이 변화해왔다. 올해 각각 102년, 80년을 맞는 교가와 교표의 변화상과 의의를 되짚어 봤다.

△1908년 처음 시작된 이화의 노래…22년 후, 현재 불리는 교가 만들어져
“참 영화스런 학당은 이화학당일세, 사면에서 온 수백명 학생 다 지금들 노래하네, (중략) 배 리, 꽃 화, 배울 학, 집 당, 리화학당 리화학당” (이화학당 제 1교가 중 일부)

교가의 역사는 1908년부터 시작됐다. 이화 최초의 교가는 1906년 오케인(E. T. O`Kane)의 곡조에 김정진 선생이 가사를 붙인‘이화학당 제 1교가’였다. 이 곡은 1908년부터 창립기념행사, 졸업식 등 공식행사에 쓰였다.

1910년대에는 졸업생들이 교가를 만들었다. 신마실라씨는 1914년 ‘이화학당 제 3교가’를, 박인덕씨는 1918년 ‘이화학당 제 4교가’를 작사, 작곡했다. 두 곡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던 서구민요나 찬송가를 편곡하고 가사를 붙여 만들어졌다.

이화의 현재 교가는 학생회지 <이화>에 실린 ‘이화노래’를 바탕으로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 이화여전에서 한문과 조선문학을 강의한 정인보 선생이 작사를 맡았고 음악과 안기영 전 교수와 메리 영(Mary E. Young) 전 교수가 작곡을 했다.

이화의 교가는 일제강점기 시기를 거치며 민족수난사를 겪기도 했다. 1937년 말, 일제는 한글사용을 금했고 교가는 닛가이도(二階堂) 선생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돼 불렸다. 1943년 말에는 이화여전이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바뀌면서 아예 교가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후 본교는 해방과 동시에 잃었던 교가를 되찾았다.

현재 불리는 교가는 본교의 역사 및 정신을 담고 있다. 이배용 총장은 5월26일(수) 오전11시30분 창립124주년 기념채플에서 “1절은 이화의 역사, 2절은 한국 여성사, 3절은 이화의 설립 이념인 기독교 정신을 담고 있다”며 “후렴은 이화의‘진선미’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선미는 창립당시부터 이어져 오던 교육 정신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던 김상용 선생이 1930년 학교의 신조로 제안해 채택된 이념이다. 이 총장은 “이화의 ‘진선미’정신은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는 진실과 지혜, 인격적 덕성,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뜻한다”며 “124년 동안 이화의 정신 속에 강조되어 왔다”고 말했다.

△비공식교표에서 시작된 배꽃문양에 담긴 이화의 80년
본교의 상징인 교표는 1914년 비공식적으로, 1930년 공식적으로 제작된 후 이화의 역사와 함께 변화해왔다.

1914년 대학예과(대학 학부 진학을 위한 예비과정) 졸업생인 최매지씨는 비공식적 교표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 교표는 현재까지 학생 공용의 교표인지, 졸업기념 교표였는지 알 수 없어 공식적인 교표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최매지씨 교표의 중앙 꽃술 부분에는 그의 졸업년도인 ‘1914’가 새겨져 있으며 5개의 흰 배꽃 잎 사이에 녹색 잎이 어우러져 있다. 각 꽃잎에는 시계방향으로‘이화중학부’라는 말이 새겨져있다.

현재 본교 교표의 모태가 된 이화여전의 교표는 1930년 이화여전의 밴플리트 선생(Edna M. Van Fleet)에 의해 디자인됐다. 선생은 순은을 사용해 배꽃잎 5장이 바깥 둘레를 장식하고 있는 형태로 교표를 제작했다. 배꽃 잎 안쪽 2개의 원 위아래로는 태극과 배꽃이 자리 잡았다.

태극은 국가의 상징이자 조화의 근원을 나타내는 동양철학의 상징이다. 또한 흰색 배꽃은 정숙하고 순결한 학생들의 품위를, 녹색 잎은 번영을 상징한다. 선생은 배꽃의 왼쪽으로 ‘EWHA’와 대학과 창설연도인 ‘1910’을 적고, 오른쪽에는 ‘College’와 전문학교 창설연도인‘1925’를 새겨 넣었다. 작은 원 안쪽에는 숭례문과 학교표어‘진선미’를 새겼다.

1933년에는 교표의 모습이 일부 변해 교표 둘레의 배꽃이 없어지고 태극 자리에 십자가가, 배꽃 자리에 태극이 위치하게 됐다. 

일제의 강압은 본교 교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9년 일제에 의해 교표에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숭례문과 태극문양이 없어지고, 순은이었던 소재가 납으로 바뀌었다. 숭례문이 있던 자리에는 ‘이전(이화여전)’이 대신 새겨졌다. 1943년에는 일제가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 외의 종교를 허락하지 않아 기독교정신을 나타내는 십자가 모양도 교표에서 없어졌다.

1945년, 교표는 민족의 해방과 함께 제약에서 해방됐다. 교표는 다시 납 대신 순은으로 제작됐다. 교표의 ‘이화전문’도 ‘이화여대’로 바뀌었고, ‘College 1925’도 종합대학교 인가 연도인 ‘1945 W.U(Womans University)’로 변경됐다.

그 후 1964년 1월, 대학과 창설 연도인‘1910’이 학당 창설 연도인 ‘1886’으로 변경되며  현재 교표의 모습을 나타내게 됐다.            

정서은 기자 west_silver@ewhain.net
한보민 기자 star_yuka@ewhain.net
사진출처:『이화100년사자료집』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