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애 인구로 산다는 것
비연애 인구로 산다는 것
  • 이진송(국문·07)
  • 승인 2010.0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꿈에 부푼 신입생이었던 필자는, 동아리 선배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07학번의 무성애자는 너다.” 알고 보니 동아리에는 이성도, 동성도 사랑하지 않으며 비연애 상태를 유지한다는 실로 무시무시한 라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설계한 미래가 장밋빛이었던 까닭은, 절반은 연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성애자 라인이라니. 모든 비극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필자 역시 저주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수많은 미팅, 소개팅, 스파게티. 오, 스파게티!

   항간에는 25살이 될 때까지 솔로 상태를 유지하면 남자는 마법사, 여자는 학으로 승천한다는 말이 있다. 함께 승천하자고 굳건하게 결의했던 친구들이 속속들이 떠나고, 그들이 혀 짧은 소리로 전화하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가자, 아빠가 실한 놈으로 하나 잡아줄게’라는 눈물겨운 부성애를 목격하며―나는 지금도 비연애 인구이다.

   무성애자 라인의 아성 역시 굳건하여, 조만간 역사상 두 번째 승천이 이루어질 예정이다(라인의 후계자답게 선배의 승천식은 필자가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언뜻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이러한 말들에는 ‘비연애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의혹의 시선이 도사리고 있다.

   짚신도 짝이 있다던데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하자’가 있을까하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리하여 남들 다 하는 연애를 하지 않은 이는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나갈 지위를 박탈당하고, 마법사나 학과 같은 남다른 존재가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 

   연애는 매우 근대적인 관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면 1920년대 무렵 본격적인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처음 ‘자유연애’라는 사상이 들어왔다. 당시 일방적으로 짝지어지던 혼인에 반하여 청춘남녀들은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으로, 연애를 부르짖었다.

   기존의 제도에 대한 반감과 새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무럭무럭 자란 연애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보다 비대해졌다. 기이한 Day의 출현과 연애 서적, 커플 상품 등을 일일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요즘의 연애는 산업이고, 프로젝트이고,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실종되고, 보여주기 위한 연애가 넘쳐나면서 커플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 커플이 부럽지 않다고 하면? 아직 못해봐서 그렇다는 둥 쿨한 척 하지 말라는 둥의 비난이 쏟아지기 일쑤다. 1920년대의 룸펜이 술 권하는 사회에 살았다면, 2010년의 잉여인간은 연애 권하는 사회에 산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는데, 그렇다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솔로인 비연애인구는 웬만한 흉악범 뺨친다.

   어떻게든 연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보고자 기웃거리다가, 연애를 위한 연애를 거부하겠다고 다짐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금욕주의자 선언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꼭 있다). 동시에 황량한 어장관리는 물론,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펼치던 어설픈 연기와 ‘기브 미 어 쪼꼬렛’에 버금가는 소개팅 부탁도 그만두었다.

   커플은 보기 좋지만, 그들과는 또 다른 내 삶과 일상이 만족스럽고 소중하다. 좋아하는 일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끄고 쉴 자유와 눈치 없이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를 껴서 가족여행계획을 잡는 부모님에게 웃어줄 여유도 있다.

   연애를 해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경험이 있다면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은 또 따로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후자의 고유한 이야기를 너무나 도외시하며 살았고,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보도록 강제되었다.

   무슨 말을 더 하든 결국은 연애 못해본 루저의 항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분명히).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각각의 맥락에 놓이는 무수한 선택지에 따라 갈라지면서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신을 조탁해가는 과정이며, 연애는 그 안의 선택지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선택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선택하지만, 모두가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뿐이다. 연애의 여부가 일상을 통제하고 개인의 행동을 한정 지을 수는 없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낭만적 사랑의 덫에 걸려 연애하지 않는 스스로를 비하하고 좌절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때이다.

   

 이진송(국문·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