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혹은 어느 깊은 밤, 가장 적적한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당신에게 악마가 슬그머니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 온 생을 다시 한 번, 아니 수없이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열거키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똑같이 되풀이 될 것이다.”

이 제안을 받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땅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서, 그렇게 말한 그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그 악마에게 “너는 신이다. 이보다 더 신적인 것을 나는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겠는가.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이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당신이 매 순간을 충분히 즐겁게 누린 사람이라면 그를 천사로 여기게 될 것이고, 매 순간이 힘들었던 사람이라면 되풀이되는 고난에 그에게 저주를 퍼부을 지도 모른다”고 답할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 삶의 목적은 혼란스러운 세상사에 휘둘리지 않고, 그 속에서 의연히 버텨낼 수 있는 의지를 키워내 개인의 삶을 충분히 즐기는 데 있다. 니체는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 생에 대한 의지를 키워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 이 세상과 마주한 인간에게 분명 세계는 가혹한 곳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은 끝이 없었다. 악과 고통을 피해 도망쳐도 그들은 우리 주위를 늘 둘러싸고 있다. 니체는 악과 고통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니체가 삶에 절망하거나 체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담대한 인간으로 성장할 것을 제안했다. 니체는 고통과 악에 대항해 삶에 대한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성장하면 인간은 세계를 더 이상 두려운 존재로 느끼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강한 사람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현실을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운명을 사랑한다는‘운명애’다. 

작년 봄, 강원도에서는 연탄을 이용한 ‘연쇄 동반자살’이 잇달아 발생해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터넷 자살 카페를 매개로 급속도로 번진 소위 ‘자살 바이러스’는 작년 4월 한 달 간 강원지역에서 5건의 동반 자살로 남녀 1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지난해 전국을 충격에 몰아 넣었던 연탄을 이용한 ‘동반 자살’이 다시 번질 조짐이 보이고 있다. 12일(수) 하루 동안에만 경기도 화성과 강원도 춘천에서 2건의 동반자살 사건이 발생해 20~30대의 남성 4명과 여성 4명 등 8명이 숨졌다.

두 사건은 각각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발생해 지역적으로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건 현장도 자동차 안과 민박집 객실로 상이하다. 하지만 경찰은 숨진 남녀의 나이와 연고지가 제각각인 점, 창을 밀폐시켜 놓은 채 연탄을 피운 점 등으로 미뤄볼 때 특정 자살사이트를 매개로 해 동시에 이뤄진 집단 자살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만약 특정 자살사이트를 매개로 행해진 집단 자살이 맞는다면, 이날 경찰에 발견된 경기, 강원의 두 사건 외에 동반자살을 결행했지만 미처 발견되지 않은 사례가 더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08년 한해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1만2천858명으로 집계됐다. 10년 전인 1998년의 8천622명에 비하면 49%나 늘어난 수치다. OECD 회원국 중 10년 새 자살자 수가 급증한 나라는 우리나라를 빼고 거의 없다. 10년 전 우리나라의 10만명 당 자살자 수는 OECD 회원국 중 4위였으나 2008년에는 1위가 됐다.

강한 의지를 잃고, 순간의 괴로움에 생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이 다시 확산되려 한다. 어둠과 고통은 언제 어느 때건 우리의 옆에 서 있다. 어둠과 고통으로 장식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야 한다. 물론 현실을 마주하는 첫 순간은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대로 현실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세상과의 전쟁 끝에 당신은 ‘순간의 행복을 즐기는’사람이 돼 있을 것이다.    

다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옆에 선 검은 그림자를 천사라 부를 것인가, 악마라 부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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