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중가요의 전성기 속에서 아이돌그룹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랐다. 우리 세대에게 음악이란‘스튜디오’라는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제품이다. 생산 과정에서는 배제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중 나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취사선택하면 그만이다. 내 감정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들으면 내 감정이 그렇게 움직여갔다.

그러나 대중문화형태로 기획된 노래는 그 노래의 주제에서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다. 대중의 선택의 받으려면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여야 하다 보니, 노래의 가사는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이 전부다.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방적 수용자 입장에서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거부감도 별로 생기지 않는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민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을 기회가 생겼고 그것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음은 상주아리랑의 일부이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아버지 어머니 어서와요/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말께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일께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상주아리랑에는 일제시대 고향 상주를 떠나 백두산을 넘어 북간도를 거치고 머나먼 중앙아시아 땅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의 애환과 슬픈 정서가 가사와 음악 속에 녹아있다.

민족 정서도 애잔하지만,‘말께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일께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는’ 노랫말속에는 사회에 대한 은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당시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인상적이다.
다음은 정선아리랑의 일부다. 상주아리랑과는 다른 민요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오느네 백발은 손으루도 못 막고/ 저게 가는 저 청년으는 돈 주구두 못 사네/
예수나 믿었드라믄 천당이나 갈걸/ 이웃 김서방 믿다가 보니는 임시 낭패났구나/
삼베질쌈을 못 한다고 날 가라믄 갔지요/ 아사 양궐련 막걸리 안 먹구 나는 못 살겠구나/

이 민요의 매력은 바로 솔직함이다. 자신의 감정에 한 치도 꾸밈이 없다. 믿었던 김서방에서 배신당한 뒤 ‘예수나 믿었드라믄 천당이나 갈걸’이라고 후회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이러한 특징은 노래의 주체가 바로 창자이자 청자인‘자신’이었다는 데에 있다. 민요의 특성상 같은 가락에 창자의 마음대로 노랫말을 붙여 즉흥적으로 상황에 맞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민요에서는 창자의 개성이 도드라질수록 노래의 해학적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이미 놀랍지 않을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언론보도에 의하면 올해 공기업의 신입 채용 경쟁률이 533대1을 기록했다고 한다. 4월21일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20명의 신입직원 선발을 위한 공개 채용에 무려 1만657명의 구직자가 지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 경쟁률은 무려 533대 1. 모집 정원이 20명으로 비교적 적은 탓도 있겠지만 ‘533대 1’이라는 경쟁률은 기록적이다.

한 인사담당자는 “신입직원 20명 뽑는데 1만여명이나 지원했다”며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뽑아야 할지 오히려 막막하다”고 한탄한다. 지원자 중 석·박사는 550여명, 외국대학 출신자는 500명, 공인회계사 등 자격증 소지자도 70명이나 된다. 공기업 취직은 이젠‘로또’가 됐다.

바늘구멍과도 같은 취업난 속에서 수도권 명문대 졸업장, 높은 학점 유지, 900점대의 토익 점수 등의 공식은 거리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머리 속에 입력돼 버렸다.

이것은 우리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하나의 대중가요가 아닐까. 비판도 없고 개성도 없이 욕망만이 무한 복제 생산된 대중가요가 아닐까.

획일적이지 않은 다채로운 색채의 인간다움이 그립다. 때로는 우리를 88만원세대로 만들어 버린 세상에 대해 때로는 실컷 조롱하고 풍자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각자의 개성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너는 너의 방식으로 각자 나름의 민요를 불러야 한다. 창자이자 청자인‘내’가 소리판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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