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파구에 살고 있다. 송파구에는 오금동이 있다. 오금동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피난을 가면서 오금이 저렸다는 데서 오금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삼전도비가 서 있다.

삼전도비에 대한 흔한 수식어는 치욕의 역사라는 것이다. 종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삼전도비는 치욕의 상징으로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겨우 남겨둔 어떤 흔적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치욕이었을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의 명분은 사대모화였다. 처음에 이 명분은 수단에 불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은 정말로 점점 모화되었다. 사대는 점점 문명사회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면서 유명조선,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문명화된 사회, 그 사회를 세운 나라인 명나라,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으므로 비슷한 문명국가가 된 조선이라는 자부심이다. 그러면서 묘비에는 점차 유명조선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대명천지라는 관용구도 쓰이기 시작했다. 본래 이 말의 뿌리는 명나라 천지라는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도 이랬을까?

조선의 이전에 존재했던 고려는 이런 말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도 나왔듯이 고려는 내부적으로 황제국가를 지향한다. 그래서 태조, 광종, 인종 등 황제의 호칭을 사용한다. 고구려도 황제국이었다. 태양 속에서는 삼족오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가치관을 반영한 이미지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에 한국사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조선이 문명사회라는 것은 조선 자체의 대단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가까운 나라라서 그렇다는 틀이 조선을 관통한다.
대명천지의 마지막 황제가 죽은 후 수 백 년이 지나도 조선은 숭정 기원후의 연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교지를 보면 왕이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대부의 사생활에 속하는 비석에는 조선 고종 때까지 한결같이 유명조선을 쓰고 있었다. 사대라는 것이 치욕이 아니라면 명에서 청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사실 사대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삼전도비를 복원해서 세운 것을 보고 문득 치욕의 아이콘이라는 데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 치욕의 감정은 대단해서 심지어 2007년, 삼전도비 위에‘철거병자’라는 붉은 낙서로 훼손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불과 20만의 인구로 1억의 명나라를 정복한데다 왕조를 세워서 200년 넘게 유지한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가장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사극드라마가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만큼 일반 민의 입장에서는 가장 살기 편한, 애정이 어린 시대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앞에서는 사대하며 뒤에서는 여전히 숭정제의 연호를 쓰는 것이다. 게다가 청은 역대의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넓은 판도를 형성한 나라인데도 조선은‘유명조선’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여전히 청을 무시했다는 것은 더한 아이러니다.

조선에서 실학 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의 실용적인 학문과 기술을 배우자는 국학이 성행했다.
‘유명조선’이라는 문구에 비한다면, 삼전도비는 치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서 「규원사화」를 보면 말갈, 숙신의 후예인 청나라와 손잡고 조선인이 만주와 중원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논의가 나온다.

어쩌면 청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한 이후에 공지가 된 만주를 조선의 영토로 편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명말 청초의 시대적 상황 변화를 이용해서 베트남은 지금의 사이공을 포함한 남베트남을 영토로 편입하였고 당시 일본은 혼슈 북부 등으로 영토를 확장한다.

그러나 조선은 유명조선이라는 경직된 사고에 묶여서 오히려 20 만 명 이상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병자호란을 스스로 유발하게 된다.
그리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서 머리를 굽힌 것을 두고 치욕이라고 본다.

만약 ‘유명조선’이 옳다는 입장에 선다면 어쩌면 지금의 한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유미한국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이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역사도 다시 본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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