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

영화‘친절한 금자씨’에서 주인공 금자가 하는 말이다. 이 대사는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천사라고 불리던 그녀가 출소 후 처음 내뱉는 말. 이 말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상대방의 간섭에 대해 따끔히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나친 눈 화장과 무심한 표정은 순간 모든 관객의 시선을 그녀의 입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묘미는 무엇보다도‘너’라는 반말과‘잘하세요’라는 존댓말의 결합이 보여주는 어색함이다. 표면적으로는 존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감정이 들어있는 것이다. 5년 전 흥행했던 영화의 대사, 이게 어쨌다는 건가.

주목할 것은 이 대사가 오늘날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삼경(三更) 즈음의 TV 시사토론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다.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진 토론자들은 서로 상대방의 허점을 잡으려고 안달이다. 다른 토론자의 비판을 경청하는 것 같아도 왠지 속으로는‘너나 잘하세요!’를 외치고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TV 토론프로그램은 자칫하면 토론자들 간의 감정적인 다툼을 생중계하기도 한다.

이것을 비단 대중매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토론=싸움’으로 인식하는 학생들도 많다. 그 중 일부는‘어차피 말해도 안 통해’라든지‘상대방의 말은 전적으로 일리가 없어’라는 식의 사고를 하기도 한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나열한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기 전에 재고삼사(再考三思:다시 헤아려 여러 번 생각해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충고를 받은 사람이 다짜고짜 나에게 오지랖이 넓다며 언성을 높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모두가 상대방에 대한‘배타성’에서 비롯된다.

즉 영화 속 대사‘너나 잘하세요’의 요지는‘당신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더욱이 당신의 말에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점차 사회 공동체가 분할되고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있어서 타인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는 당연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배타성은 타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물건과도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매일 옷을 입으며 이 옷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물건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주 기능적으로,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것일 뿐이다.

물건은 협력이라도 한다고 치자. 정치, 경제, 환경 등 각종 현안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점점 배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그 반작용으로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도를 넘는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처럼 연예인들은 매체에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대중이 그들에게 포용심을 베푼다. (가끔 과도한 배타성을 드러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와 당연히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결과도 결국엔 나에게 돌아온다. 

배타성의 문제를 지적한다고 해서 절대적인 포용주의나 공동체주의를 지향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왜 통합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게 마땅하다. 다만,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배타성을 내세워 근거 없이 남을 헐뜯기 보다는 조금은 겸손(謙遜: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의 미덕을 가져보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더불어 주변의 사물, 사건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나와 연관 짓는 일이 필요하다.

얼마 전 한 아파트 주민들이 입주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아파트 단지를 통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외부인의 통행을 허용하니 입주자들에게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철문까지 만들어놓고 단지 내로 들어가는 사람의 신분 확인을 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아파트 주민들의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우리가 너무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너무 고립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넓은 스펙트럼을 헤아려야 소통은 시작될 수 있고 그래야 자신의 의견도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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